사진속일상

인왕산을 넘다

샌. 2008. 5. 16. 12:37

사무실에서만 갇혀 지내기에는 화창한 봄 날씨가 아깝지 않은가. 눈을 들면 창 밖으로 보이는 봄의 인왕산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이곳은 진경산수화의 개척자인 겸재 정선(鄭敾)의 생가터가 있던 곳이다. 얼마 전에는 사무실 앞 화단에 그 터를 가리키는 표석이 설치되었다. 겸재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린 장소가 이곳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산행의 들머리를 옥인아파트로 잡았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20 분 정도면 이르는 곳이다. 옥인아파트는 지은지 40 년 가까이 되는 서울에서도 아주 오래된 아파트다. 인왕산의 경관을 해친다고 철거한 뒤에 공원을 만들 계획으로 서울시에서는 현재 주민들과 보상 협상중이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아파트 벽에는 보상에 불만을 가진 주민들이격문을걸어놓았다. 둘 사이에 언젠가는 타협이 될 것이고, 그러면 이 60 년대의 낡은 아파트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예전의 녹지로 회복되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왠지 서운한 감정 또한 숨길 수 없다.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석문을 지나 올라가는 길에서 사람 형상을 한 바위를 만났다. 인왕산은 화강암 암반으로 되어 있으나 산 아래쪽에는 이렇게 검은 색의 구멍이 뚫린 바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아마 침식이 잘 되는 암질인 것 같다. 그래서 재미있게 생긴 바위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는 듯, 하얀 꽃들이 가득한 나무를 만났다. 바람이 불어 꽃들이 흔들리면 딸랑거리며 종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귀엽고 예쁜 꽃이다. 나무 이름은 뒤에 동료가 확인해 주었다. 때죽나무였다.

 



인왕산은 서울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아주 좋다. 다른 산들에 비해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어서 사방 풍경이 환히 열려 있다. 동쪽 방향으로는 경복궁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보인다.

 



북쪽 방향으로는 북한산 줄기 아래 평창동의 주택들이 전원풍경처럼 펼쳐져 있다. 멀리서 보니까 아름다운 걸까, 저런 산 속의 단독주택에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버짐처럼 산을 갉아들어간 모습이 나에게는 문명의 횡포로 보인다.

 



아기 솔방울을 만났다. 소나무 새 순 위에 보라색의 솔방울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린 것은 무엇이고 귀엽고 예쁘다. 갓 태어난 솔방울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보고도 무심히 지나쳤을 아기 솔방울이 오늘은 새롭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존재들을있는지도 모른 채 흘러보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상에 오른 뒤 기차바위를 지나 홍제동의 문화촌으로 내려가는 산길은 아늑하고 호젓했다. 평일이어선지 인적조차 끊어졌다. 이런 날은 산속에서 솔바람 소리, 새 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누워 있고 싶다. 인간으로서의 의식은 잠시 유보한 채 한 마리 짐승이 되고 싶다. 산길에서는 다람쥐, 장끼 등을 만났다. 그리고 아까시꽃 향기에 취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개미마을로 내려가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 분위기를 느껴보려 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서 문화촌 현대아파트로 하산했다. 여러 차례 인왕산을 올랐지만 이번에는 되도록 안 가본 길을 찾아 걸었다. 그런 길의 새로움과 함께 봄의 산길은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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