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살처분 7000000

샌. 2008. 5. 13. 11:49

지난 4 월초에 김제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으로 확산되며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끔찍한 장면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살처분이란 전염병의 확산을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푸대에 담아 그대로 구덩이에 던져 넣고 흙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병이 확인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3 km 이내의 가금류는 무조건 살처분해 버린다고 한다. 싹쓸이 대량 학살이다. 한 달 정도 되는 동안에 살처분된 닭과 오리만 이미 700만 마리에 이르고 있다. 방역의 목적은 생명을 지키자는 것인데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도륙하는 잔인성이 이율배반적이고 무섭기만 하다.


나는 우선 ‘살처분’이라는 용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살처분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붙일 명칭이 아니라고 본다. ‘생명’을 처분한다거나 처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미물이라고 해도 생명은 생명이다. 사람의 목숨이 소중한 만큼 동물의 목숨도 소중하다. 그들 역시 창조계의 일원으로 그 생명은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살처분 같은 차가운 용어를 쓰면서 생명의 존엄성이 아이들 마음에 깃들 리가 없다.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며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오리가 사라진 호수에 놀러 나온 젊은 엄마와 아이가 인터뷰를 했다. 엄마는 오리가 있었더라면 무서웠을 텐데 오리를 전부 잡아가 살처분해서 안심하고 놀러올 수 있었다는 식의 말을 했다. 유치원에 다닐 법한 아이 역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오리가 무섭다고 했다. 참으로 슬픈 장면이었다. 그들 모녀 역시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방송에서 표현된 것은 아이의 마음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살처분의 방법도 문제지만 전염병 예방을 위해서 꼭 저렇게 대량 학살을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나 자신 AI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지금의 무차별적인 살처분 방식은 AI에 대한 지나친 대응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좀더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감염경로를 파악해서 선별적으로 살처분할 수는 없는지 모르겠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생매장시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 서울에서는 AI가 특정구에서 발병했다고 전 서울의 닭과 오리를 모두 살처분해 버렸다. 그리고 야생 오리까지 때려잡는다고 볼썽사나운 모습도 연출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방역 최고라고 자랑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살처분 광풍은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인간을 위해 닭과 오리의 생명을 우습게 본다면 나중에는 인간의 목숨까지도 그런 취급을 당할 것이다. 나중에 속수무책의 인간 전염병이 발생한다면 다른 지역의 전염을 막는다고 발생 지역의 인간들을 모조리 살처분할 계획을 짤지도 모른다. 그것은 SF의 소재만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상상이다. 자기 집의 애완견은 애지중지 키우고, 그러다가 아프면 고통 없게 죽도록 안락사를 시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수백만 마리의 생명이 참혹하게 죽어가도 눈 깜짝 하지 않는다. 고기 먹기는 좋아하면서 그런 고기가 어떻게 비위생적이고 험한 환경에서 사육되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모순이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근의 광우병 사태와 함께 살처분이라는 동물의 대량학살을 바라보는 심정은 슬프고도 착잡하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 문명에 대한 위기의 신호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의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떤 무서운 전염병이 나타나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가할지 모른다. 인간의 탐욕과 인간중심 사고방식, 그리고 생명 경시의 풍조가 계속된다면 시기가 문제이지 종말의 날은 반드시 닥칠 것이다. 이미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변화는 발등의 불이 되었다. 광우병과 AI 소동 또한 대재앙의 전주곡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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