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0)

샌. 2008. 4. 28. 12:05


1960년대에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부터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경쟁 체제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읍내에는 중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그 중에서도 Y 중학에 들어가는 목표였다. 산골 초등학교에서 거기에 입학하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도 일부 아이들은 남아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과외를 받았다. 옛날 시골에 학원이 있었을리 만무하니 가르쳐줄 유일한 사람이 담임선생님이었다. 장소는 학교 숙직실이거나 선생님 집이었다. 선생님께 드리는 보수도 없었으니 선생님은 무료 봉사로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치셨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특별 과외를 받았던 친구들은 담임선생님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자신이 담임하던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쳐도 문제되지 않던 그때는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한 학급 친구 중 반 정도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공부가 모자라는 탓도 있었고, 가정 사정 때문인 경우도 있었다. 6학년이 되면 진학할 아이와 진학 못 할 아이로 자연스레 나누어졌다. 선생님의 수업 역시 진학 위주로 이루어졌으므로 소외되는 아이들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진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은 운동장에 나가 노는 경우가 잦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교실의 자리도 성적순으로 앉게 했다. 시험을 한 번 보고나면 순서가 바뀌곤 했는데 아이들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너무 잔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동창모임에 나가면 꼭 그 시절 얘기가 나오는데 공부를 잘 한 아이들과 못 한 아이들의 반응이 확연히 다르다. 공부를 잘 한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에 대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는데 공부를 못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얘기를 들어보면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한데 대한 서운함이 의외로 깊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어린 영혼에 맺힌 상처는 여전히 선연히 남아있다.


44년 전의 이 사진은 당시 읍내에 있던 중학교에 진학한 동무들과 찍은 기념사진이다. 합격이 결정된 후 담임선생님이 우리들을 읍내 사진관에 데리고 가서 찍은 사진이다. 남자들로만 된 우리 반은 여기에 나온 열두 명 외에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 아이도 있었다. 그것은 당시 시골 학교로서는 상당히 좋은 진학 성적이었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오로지 담임선생님의 열정 때문이었다. 비록 지나치게 진학 위주의 교육이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지만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 열정에 대해서만큼은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지나친 입시 위주의 교육이 남긴 상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앙금이 남아있음을 동창 모임에서는 느낄 때가 있다. 술이라도 거나하게 들어가면 속에 숨겨 두었던 얘기들이 거침없이 나온다. 어떤 동무는 서러움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가난하고 공부를 못해서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그 생채기가 알코올의 힘을 빌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긴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저 사진은 어렸을 때의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진에 들어있지 않은 동무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나이가 이제야 되었나 보다. 어른이 되어서 흘리는 동무의 눈물을 보고 나는 왠지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그 시절 중학교 진학의 꿈을 접은 채 교복 입은 모습을 부러워했을 동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데 대한 죄책감때문인지 모른다. 철모르던 시절에는 그저 남보다 앞선 것이 우쭐했고 칭찬 받는 것이 좋았다. 오직 1등이 되려고 했고 남보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그에 대한 의미를 묻지는 못했다. 이제 긴 세월이 흘러 그렇게 노심초사 애쓰며 분투했던 것에 대해 초연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지나고 보면 당시에 느꼈던 만큼의 가치와 의미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는 늘 현실에 대해서 과대평가를 하게 된다. 한창 꿈에 부풀었던 내 어린 시절의 한 때, 지나고 보니 한 바탕 큰 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 역시 또 다른 꿈속에서 안절부절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세월이 말하길 전혀 그럴 필요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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