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걷고 싶은 길 10

샌. 2008. 5. 20. 17:32

새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직장도 가정도 훌훌 털고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삶의 족쇄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대비되어 괜히 울적해지고 쓸쓸해진다. 난 언제쯤 그렇게 자유롭게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특별한 인물의 흉내를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본인들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자신들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펄쩍 뛸 것이다.누구라도 길을 나설 수 있다고 하지만 허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내가 꿈 꾸는 건 일탈과 자유, 그리고 끝 없는 길 위에 서고 싶은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말 그대로의 그저 꿈일 뿐이다.그래서 꿈을 행동으로 옮긴 그런 사람들의 여행기는 날 동경에 젖게 한다.

김남희가 쓴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런 느낌 속에 젖었다. 대리만족으로 만족하기에는 길을 직접 걷고싶은 유혹이 너무 컸다. 부록으로 책 뒤에는 저자가 추천한 숨어 있는 우리 흙길 열 곳이 소개되어 있다.이제껏 살았으면서도 이 길들 중 제대로 걸어본 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멀리 외국을 넘볼 것이 아니라 우선우리 땅의 이 길들부터 걸어봐야겠다. 책에 소개된10 개의 길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았다.

1.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경북 울진군 서면 금강소나무숲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21세기에 보존해야 할 첫 번째 숲’에 뽑힌 곳이다. 수령이 오백 년 이상 된 소나무가 다섯 그루, 이삼백 년생이 8만 그루, 총 백만 그루의 금강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삿갓재(1119m)에서 발원한 큰빛내골(광천계곡)은 금강소나무숲과 나란히 13km를 흘러간다. 계곡에 놓인 다리 22개 중 절반 이상은 비가 오면 잠기는 잠수교여서, 비 오는 날 숲을 찾으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물의 감촉을 즐길 수 있다. 소광 1리에서 이 소나무숲으로 가는 이십 오 리 길(10km)은 이 다리들을 건너 계곡과 함께 걷는 길이다. 푸른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걷노라면 이따금씩 바람결에 실려오는 솔향이 온갖 걱정으로 찌든 머릿속을 환하고 맑게 비워준다. 소나무숲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임도는 봉화군 석포면과 경계인 삿갓재 능선을 넘는다. 이 길은 산림청 차를 제외하고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어 걸어넘기에 좋은 길이다.


2. 정선 자개골


평창군 진부면의 박지산(1391m)에서 발원한 봉산천 물줄기는 두루봉(1226m) 기슭을 스쳐 정선 땅으로 들어와 상원산(1421m) 허리를 돌아 정선군 북면 유천리에 이르러 송천으로 흘러든다. 약 15km 길이의 봉산천은 심산유곡의 정수를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 상원산 북동쪽 기슭의 상자개와 하자개를 잇는 구간을 자개골이라 한다. 자개골은 상원산과 옥갑산, 다락산 등 1천 미터를 넘는 고봉들 사이의 비좁은 협곡을 흐르는 탓으로 주변에 오염원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 물이 맑다. 수량도 풍부해 계곡은 곳곳에 크고 작은 소를 이루며 흐르고, 숲은 자연 그대로 살아있다. 이곳 계곡은 장마 뒤에도 물이 맑아 물빛에 반하는 곳이다. 자갯골에서 봉산리 고개 정상을 지나 평창군 신기리까지 이어지는 27km의 비포장도로는 정선토박이들이 정선의 마지막 오지로 꼽는 길이다. 구절리를 지나 자개골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맑은 계곡이 흐르고, 사륜구동이 아니고는 다닐 수 없는 비포장길이 나온다. 기암괴석은 없는 계곡이지만 물은 더할 나위 없이 차고 맑고, 길은 양옆으로 나무와 숲이 이어져 걷기에 좋고 호젓하다. 두 시간 남짓 걸으면 두루산방과 대광사가 나오고, 대광사 지나 봉산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평창군 신기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다. 전체 구간을 걷는데 걸리는 시간은 8시간 남짓.


3. 섬진강 강변길


섬진강이 품고 있는 우리 강마을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많지만, 그 중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에서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까지 이어지는 18km의 강변길이다. 이 길은 우리 강과 강마을의 소박하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있는 길이다(물우교 - 장암리 - 진메 마을(김용택 시인 생가) - 천담분교터 - 천담 마을- 장구목 - 구담 마을). 강변의 억새와 익어가는 벼들, 마을 입구의 품 넓은 당산나무들과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들꽃들, 해 저문 강변의 고즈넉함과 이른 새벽 물안개를 피워내는 모습은 언제 찾아가도 팍팍한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 같은 넉넉한 풍경이다. 현재 진메 마을에서 천담분교터까지만 비포장길로 남아있지만, 천담분교부터 장구목까지 이어지는 길 역시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한가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4. 구절리 송천계곡


걷기는 증산에서 출발한 정선행 꼬마열차의 종착역 구절리에서 출발한다. 기차역에서 2.5km 남짓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오장폭포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비포장길이 시작된다. 길은 계속 강을 따라 이어지고 곳곳에 아늑하고 호젓한 숲길이 이어지고는 해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다. 폐광 터를 지나 동초밭에 이르면 민가가 세 채 보인다. 갈림길에서 직진해 새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한터 마을이다. 94년 폐교된 왕산초등학교 한기분교가 엉겅퀴와 역귀군락이 무성한 언덕 위에 남아 있다. 한터 마을에서 배나드리까지는 다시 7km를 더 가야 한다. 송천의 상류 마을인 배나드리는 ‘뱃터’라는 뜻으로 조양강 - 동강 - 남한강 - 한양까지 긴 뗏목여행의 출발점이었던 곳이다. 구절리 종량동에서 출발, 한터 마을까지 갔다 되돌아 나오면 왕복 12km, 세 시간 거리이다. 구절리 기차역에서 출발할 경우는 한터 마을까지 되돌아오는데 왕복 20km, 다섯 시간 거리.


5. 대관령 옛길


대관령 옛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던 길이자, 강릉의 해산물과 농산물이 선질꾼의 지게에 실려 영서로 넘어가던 길이다. 가족과 연인이 걷기에 참 좋은 예쁜 길 가운데 하나이다.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당히 넓은 흙길이고, 숲은 맑고 깊다. 굽이굽이 휘돌며 이어지는 길은 때로 낙엽에 덮이고, 그 위로 부지런한 다람쥐들이 길섶을 가로지르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따라온다. 걷기에 자신 없는 초보자들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대관령 중간에 위치한 반정에서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초입의 대관령 박물관까지 이어지는 전체 길이는 4.3km다. 반정에서 내려갈 경우 소요 시간 두 시간, 반대편에서 올라올 때는 두 시간 반 소요.


6. 곰배령


곰배령(1100m)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인제군 인제읍 사이에 가로놓인 능선상의 안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광활한 초원을 이룬 곳이다. 곰배령은 마지막 남은 생태계의 보고로, 야생화 트레킹의 1번지로 꼽힌다. 이 일대는 식물자원 보존지역이므로 산림청에 출입신고를 해야 하며 일체의 취사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곰배령으로 향하는 길은 두 가지인데, 그 중에서 진동리에서 오르는 길은 단목령과 곰배령 길이 갈라지는 진동 삼거리에서 트래킹을 시작한다. 이정표를 따라 민가 옆으로 난 숲길로 접어들면, 울창한 숲길이 이어지는데 강선계곡과 나란히 걷는 이 길은 평지나 다름없이 경사가 완만하다. 2 km 남짓 지나면 산나물과 약초 채취가 주업인 네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곳부터 길이 좁아지기 시작하고 오솔길을 따라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입구부터 곰배령 정상까지는 4km이며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된다. 진동리 강선마을 설피밭에서 시작해 강선계곡-곰배령-작은 점봉산-큰 점봉산(정상)-설피밭으로 이어지는 원점회귀 산행은 다섯 시간이 걸린다.


7. 동강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 그 유명세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강, 동강. 강원도 정선읍 가수리에서 동남천과 만나 시작되는 동강은 51 km를 흘러 영월군 하송리에서 서강과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흐른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헤집고 흘러내리는 동강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사행천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강 주변에는 황조롱이와 원앙, 수달, 어름치 등 천연기념물 여덟 종이 서식하고 있고, 강변 곳곳에는 이곳 사람들이 뼝대라 부르는 잘 생긴 바위절벽들이 도열해 있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출발한 물줄기가 평창과 영월을 적시며 흘러가는 2백 리 물길에서 동강의 정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어라연이다.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의 혼령이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여기서 신선처럼 살고자 했는데, 이때 물고기들이 줄을 지어 반겨 그 일대가 마치 고기비늘로 덮인 연못과 같다고 해서 어라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영월읍 거운리에 있는 어라연 입구 매표소에서 표(1500원)를 끊은 후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왕복 약 6 km로 세 시간이 걸린다. 완만한 높이의 산길과 강변길, 자갈과 모랫길이 적당히 섞여 아기자기한 맛을 풍긴다. 비교적 쉽게 동강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어라연 못 미쳐 왼편으로 조그마한 야산이 나오는데 이곳에 오르면 어라연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동강에는 다양한 트래킹 루트가 있다.

(1) 백운산 정상에서 동강을 조망하는 코스; 8 km, 5 시간.

(2) 뇌른 마을 - 황새여울 - 된꼬까리 - 진탄 나루터 - 기화천 계곡 - 미탄면 소재지

(3) 백운산 - 칠족령 - 연포 마을 - 소사 마을 - 고성리 - 신동읍

(4) 진탄 나루에서 출발해 문산 나루터까지 오는 코스; 8 km, 3 시간.

(5) 문산 나루터 - 두꺼비바위 - 어라연 - 섭세강변; 15 km, 4 시간.


8. 아침가리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 자리잡고 있다. 구룡덕봉(1388m) 기슭에서 발원해 오십 리를 흘러 방태천으로 들어가는 계곡인 아침가리는 구룡덕봉, 응복산, 방태산, 가칠봉 등의 준봉에 둘러싸여 있다. 이 봉우리들에 가려 아침 한나절 잠깐 비추는 햇살에 의지해 밭을 간다는 뜻으로 아침가리라 불리게 되었다. ‘정감록’에서 난을 피해 들어가 살 만한 곳으로 꼽은 ‘삼둔 사가리’가 바로 살둔, 월둔, 달둔리와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다. 한 때는 이 계곡에 화전민이 살기도 했으나 지금은 두 가구만이 남아 있다. 상류는 월둔, 명지가리, 방동약수를 잇는 도로와 접해 있지만, 하류로 갈수록 원시림을 느끼게 하는 깊은 골짜기와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삶이 팍팍할 때면 찾아가 물빛에 얼굴을 비추고 세상을 살아온 표정을 읽어보는 곳이다.


9. 홍천군 명개리에서 오대산 상원사까지


오대산 상원사 관대거리에서 홍천군 명개리로 이어지는 20 km 비포장도로는 흙먼지 날리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걷는 길이다. 걷는 사람은 거의 없고 어쩌다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차량들만 간혹 만나는 길로,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길, 시원한 전망이 내내 걷는 이를 즐겁게 하는 길이다. 상원사 입구에서 시작해 북대사를 지나 고갯마루에 오르면(1310m)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걸어 홍천군 명개리로 나오면 총 길이 20 km의 길이 끝난다. 소요 시간은 대여섯 시간. 시간이 있다면 오대산 월정사 입구부터 걷자. 월정사 입구인 일주문부터 본전 앞마당까지 펼쳐진 전나무숲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백 년에서 오백 년을 산 전나무 수백 그루가 하늘을 가리며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곳부터 걷는다면 상원사 입구까지는(8km) 오대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10.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굴목이재


전남 순천의 조계산(884m)은 양쪽 어깨자락에 남도의 천 년 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고 있다. 송광사와 선암사 모두 일주문에서 절로 향하는 길이 곱고 예쁜 흙길로 남아 있어 맨발로 걸어도 좋다. 어느 계절에 가도 아름답지만, 빛 바랜 단청 아래 홍매화와 벚꽃, 진달래와 산수유가 다투듯 피어나는 선암사의 봄, 화려한 단풍이 연못까지 온통 물들여 눈을 어지럽히는 송광사의 가을이 특히 빼어나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6.7 km의 굴목이재 산행은 절을 누비며 산으로 드는 숲길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숲이 그윽하고 길은 순해 가족, 연인이 함께 걷기에 제격이다. 송광사에서 선암사까지는 3 시간 남짓 걸리며, 재 중턱에 있는 보리밥집의 직접 담근 탁주 한 사발과 꽁보리 비빔밥 한 그릇은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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