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봄비 내리는 골목길을 걷다

샌. 2008. 3. 29. 17:54



친지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봄비 내리는 길을 걸었다. 길도 여러 길이 있지마는 도시에서는 그래도 골목길이 으뜸이다. 대로 뒤켠에 숨어있는 골목길은 우선 자동차의 소음이나 사람들의 번잡함이 없어서 좋다.

 

골목길은 도시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길이다. 뒷골목에는작은 구멍가게가 남아 있고, 어릴 때 만났던 풍경들의 흔적이 흐릿하게나마 살아 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는 가능하면 골목길을 찾아서 걷는다.

 

오늘도 1 시간이 넘게 봄비 내리는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선택된다. 대체로 좁고 허름한 쪽일수록 호기심을 느끼게 되어 찾아들게 된다.

 

집집마다 집의 모양이 다르고, 담장이 다르고, 마당에 자라는 나무들이 다르다. 그런 것들을 눈구경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집을 보면 대개 집주인의 성품을 알 것도 같아진다.

 

벽돌담의 마른 담쟁이덩굴이 그리는 생명의 선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저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제 저기에도 연초록 잎이 좁쌀알만하게 돋아나오고 있다. 이 비가 지나고 나면 이제 초록의 생명 에너지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리라.

 

특히 지금 같은 때는봄꽃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마당의 꽃나무 중에서는 우아한 귀족풍의 목련이 제일 많다. 백자를 닮은 부드러운 흰색의 꽃무리는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어쩌다 매화꽃이라도 만나면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그 집에는 왠지 품격 있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친구가 이태준의 '무서록'을 빌려 주었다. 거기 '매화'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국화를 능상(凌霜)이라 하나 매화의 고절(苦節)을 당치 못할 것이요 매화를 백천 분(百千盆) 놓았더래도 난방이 완비되었으면 매화의 고절을 받아보기 어려우리라. 절개란 무릇 견디기 어려운 데서 나고 차고 가난한 데가 그의 산지(産地)라 인정이니 생활이니 복이라 함도 진짜일진댄 또한 고절의 방역(方域)을 벗어나 찾기는 어려운 줄 알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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