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하숙생

샌. 2008. 3. 20. 09:41

아내는 가끔 날 보고 하숙생이라고 놀린다. 집에 들어와서는 별로 하는 말도 없이 그저 주는 밥 먹고 방에 들어가 혼자 있다가 소식도 없이 자 버리니 아내 입장에서는 하숙생 한 사람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겠다. 정말 어떤 날은 아내와 한두 마디밖에 하지 못할 때도 있다. 특히 이곳으로 이사 와서는 방에 여유가 있어서 아내와 나는 거의 각방살이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부부가 떨어져 자는 것이 이상했는데 지내고 보니 그것이 훨씬 더 편하다. 그건 표현은 안하지만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이 멀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은 하지만 말만 그럴 뿐 밤이 되면 ‘마이 웨이’를 간다.


각방살이의 핑계를 대자면 잠자는 습관의 차이와 내 코골이 때문이다. 아내는 밤 12시를 넘겨 한두 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든다. 반면에 나는 저녁 9시만 지나면 이불 속에 들어간다. 나는 전형적인 ‘롱 슬리퍼’(long sleeper)이다. 하루 평균 여덟 시간은 자는데 그래도 잠이 부족해서 새벽에는 일어나기가 힘들다. 반면에 아내는 불면증 증상이 있어 잠자는 시간도 짧고 잠이 깊지도 못하다. 또 나는 피곤하면 코를 심하게 골기 때문에 아내의 귀한 잠을 방해하기가 일쑤다. 그런 탓으로 전에도 아내는 거실로 달아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니 빈 방에 여유가 있는 지금은 힘들게 옆에서 자려고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신경이 덜 쓰여서 좋은 건 마찬가지다.


하숙생의 입장에서 제일 큰 문제는 아이들과의 대화 단절이다. 언제부턴가 아이들과의 대화가 끊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말 붙이는 것조차 어색하게 되었다. 물론 아이 둘 다 직장에 다니니 부녀간에 서로 얼굴을 대할 시간도 거의 없다. 가족이 식사를 함께 하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된다. 어쩌다 아이들이 전부 집에 있는 휴일이 겨우 함께 있을 수 있는데 그마저도 침묵의 관성에 의해 하루 종일 말없이 지낸다. 이젠 말없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은 친구처럼 다정스럽다. 부럽지만 거기에는 내가 낄 자리가 없다. 나는 그저 내 방에 들어앉아 책을 보거나 TV를 본다. 아이들과는 취향이 달라 서로 공유하는 프로그램이 없다. 아내는 억지로라도 아이들이 보는 프로를 같이 보면서 대화를 시도하라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러니 하숙생이라 부른들 쓴웃음만 지을 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료들에게서 제일 부러운 것은 자식들과 다정하게 지내는 얘기를 들을 때이다. 나로서는 정말 먼 나라 얘기다. 그렇게 된 데는 내 책임이 크다는 것을 잘 안다. 내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워낙 특이해서 자식들과의 대화의 접점을 찾지 못했다. 내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나 또한 아이들의 세계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내 시선을 향할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저 가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친밀해지기에 뭔가 부족한, 나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숙생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외롭다. 그러나 내가 겪는 외로움은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인생은 원하는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한 쪽을 고집하면 할수록 다른 쪽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한 쪽을 바라보는 바람에 내 고개는 유연성을 잃어버렸다. 그동안 가족들이 있는 쪽을 돌아볼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마음과는 달리 굳어버린 고개가 잘 돌려지지 않는다. 아마 억지로 돌리려고 하면 탈이 날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를 얻은 대신에 다른 것을 놓친 셈이다. 얻고 잃은 가치의 우열을 비교할 수는 없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안다.


잃은 쪽을 생각하면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아내에게는 든든한 남편이, 아이들에게는 따스한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한 과실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는 부족했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살아온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길 또한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므로, 진정을 가지고 걸어온 길이었으므로, 언젠가는 내 가족들이 나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시야를 넓게 보면 하숙생 의식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가정에서 하숙생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생명을 받은 지구별에서 하숙생 의식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별의 주인이 아니다. 그저 손님으로 와서 잠시 머물다가 가는 하숙생일 뿐이다. 그런 의식은 우리를 조심스럽게 살게 하고 지구를 험하게 다루지 않게 해준다. 마치 주인집의 비품을 훼손하면 변상해야 하듯이 함부로 지구를 다룬 사람은 뒤에 어떤 책임을 져야할지도 모른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사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쓸쓸하고 외로운, 이 지구별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하숙생인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가슴으로 따스하게 보듬어 안아야 할 연약한 생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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