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그녀가 뒤돌아 앉아 소리 없이 운다. 가끔씩 휴지통의 휴지만 조심스레 뽑혀나갈 뿐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척 서러운가 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녀의 눈물이 비를 부른다. 그래서 비 오기 전의 수런거림으로 마음은 바빠진다. 산다는 건 이렇듯 어쩔 수 없이 수런거리는 것이다. 그녀가 소리도 없이 울고, 나는 뒤에서 아프게 지켜 보고, 어느새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만들고 있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공시대 / 문정희 (0) | 2007.03.15 |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0) | 2007.03.11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박목월 (0) | 2007.03.02 |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0) | 2007.02.23 |
이웃 / 이정록 (0) | 2007.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