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테일러 게토(J. T. Gatto)가 쓴 ‘바보 만들기(Dumbing Us Down)'를 읽었다.
미국의 학교교육 제도와 조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인데, 우리나라 현실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프러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을 거쳐 수입된 학교교육의 구조적 문제점을 우리도 현재 심각하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교육의 근본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요구한다. 책의 내용이 어떤 사람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특히 사회 주류를 이루고 있는 ‘똑똑한 바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토는 현재 대다수 학교의 교육과정은 ‘바보 만들기 과정’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책 내용의 몇 부분을 인용해 보았다.
학교교육을 더 많이, 더 잘 받은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하고 살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봉사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물신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일 자체가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월급 타먹으며 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능력을 늘려 주는 것이 아니라 줄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종소리, 교실에 가두기, 맹목적인 줄 세우기, 동년배 모아놓기, 혼자 있지 못하게 하기, 끊임없는 감시 같은 학교제도의 일반적인 요소들이 마치 누군가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꾸며낸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중독 상태나 종속적인 태도에 빠지도록....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가 있습니다.
첫째,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저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파편화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저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 교실에 가둬 두기.
번호 매긴 교실의 가르침이란 모든 학생이 피라미드 속의 돌덩이처럼 정해진 자기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숫자의 마술인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무관심하도록 가르치기.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방법은 아주 교묘합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제 강의에 완전히 몰두하도록 요구하는 겁니다.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시키는 겁니다.
넷째, 정서적 의존성을 가지도록 가르치기.
미소와 찡그림,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저는 아이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고 박탈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섯째, 지적 의존성을 가지도록 가르치기.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착한 학생들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 훈련받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정해주도록 기다리게 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할지 전문가들의 지시를 받으려 합니다. 이 가르침이 행해지는 바탕 위에 우리의 경제 체제 전체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회사업이라는 것은 설 땅을 잃고 근세에 태어날 당시의 역사적 조건 속으로 사라져 버리겠죠. 정신장애자의 공급이 끊겨서 상담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공황에 빠지겠죠. 사람들이 제멋대로 노는 방법을 다시 익힘에 따라 텔레비전을 비롯한 상업 오락과 흥행물들은 말라죽어 버리겠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심고 따고 썰고 요리하는 일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면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전문 음식사업이 대폭 위축되겠죠. 근대 법학과 의학, 공학의 상당 부분도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의류산업과 학교산업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두가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존성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존재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여섯째, 자신감을 빼앗기.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평가와 판별을 받습니다. 매달 번듯한 모습으로 모든 학생들의 가정을 찾아가는 통지표는 부모들에게 자기 아이에 대해 얼마만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껴야 할지 퍼센트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지구상에 나타난 바 있는 모든 주요한 철학 체계의 밑바탕이 되었던 자기 평가라는 개념은 전혀 설 땅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너희들은 항상 감시되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이 끊임없이 너희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수업 사이의 휴식은 정확히 3백 초로 제한해서 우발적인 동료애가 생겨날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저는 숙제라는 이름으로 학교 공부가 집안에까지 연장되도록 시킵니다. 감시 자체는 연장되지 못해도 감시의 효과는 연장되는 셈입니다. 사회를 확고한 중앙통제 아래 잡아 놓으려면 아이들을 빈틈없이 감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제복을 입혀 악대 속에 묶어 놓지 않으면 떠돌이 피리쟁이를 따라가 버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피지배계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수단입니다.
(지은이의 이런 지적에 불편해하지 않을 교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계급적 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제 뛰어난 동료 교사들 중에도, 그리고 제가 만나 본 가장 훌륭한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이 다른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규모 학교에서 국가 독점 의무교육이 거둔 위대한 승리를 보여 줍니다.
이 어느 것도 필연적이 아닙니다. 이 어느 것도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피라미드가 가진 환상의 힘을 우리가 깨뜨릴 수 있을 때 이 사실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긴박한 국제경쟁의 신화를 언론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와중에서 믿기는커녕 상사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위협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 의미를 찾을만한 곳, 가정과 친구 관계, 계절의 변화, 자연, 단순한 예절과 의식, 호기심, 너그러움과 동정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봉사, 존엄한 독립성과 개인이 영역, 이처럼 참된 가정과 참된 친구관계, 참된 지역사회를 세워 주는 돈 안 드는 온갖 요소들에 의미를 두는 그런 철학을 우리가 회복할 수 있다면, 이런 것들의 의미를 우리가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아쉬운 것 없는 상태가 되어 정치경제학의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마음을 쏟으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물질적 ‘풍요’조차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학교교육을 전면적으로 재고할 경우 그 비용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것보다 너무나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이해관계가 얽힌 세력들이 놓아둘 수 없을 것입니다. 공교육에 어떻게든 자유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해결의 길을 찾는 가장 그럴싸한 방법입니다. 가족학교들, 소규모 기업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들, 농장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하는 자유시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 문화 위에 덮쳐 오고 있는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비물질적인 경험의 지혜를 익히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그 미래는 우리에게 물질의 사용을 극소화하는 자연의 길을 따라 살 것을 생존을 위한 대가로서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학교에서는 그 방향의 공부가 가르쳐질 수가 없습니다. 12년 징역과도 같은 학교 제도, 거기서 진정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나쁜 생활태도뿐입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학교교육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806년이었어요. 나폴레옹이 예나 전투에서 프러시아의 정예 군대를 무찌른 해였죠. 전투에서 지자마자 피히테라는 독일 철학자는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Address to the German Nation)'이라는 글을 발표했어요. 피히테는, 잔치는 끝났으니 국가는 이상적인 의무 학교교육 제도를 새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프러시아 국민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힘에 떠밀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강제적인 학교교육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한 현대 의무교육은 중앙집권화한 학교가 어떤 사람을 길러낼 것인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1)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2)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
3)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4)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5)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프러시아에서 92퍼센트의 아동을 교육하는 국민학교(Volksschule)의 목표는 지성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였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따르는 법 말고는 진짜로 가르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없이 많은 선량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이 학교에서 교사로, 직원으로, 보조원으로 일하고들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제도 자체의 추상적 논리 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아무리 정성을 쏟고 열심히 일해도 제도 자체가 미치광이입니다. 양심이 없는 제도죠.
같은 사회계층에 속한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끼리 묶어서 감금 상태에 두는 체제에 속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반생명적인 일입니다. 이 체제는 아이들을 삶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상생 상극 관계로부터 절연시켜 놓습니다. 아이들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시켜 영속적인 현재 속에 묶어 놓는 것은 텔레비전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입니다.
학교와 텔레비전은 아이들의 삶을 통제하며 의존형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시간을 스스로 채울 줄 모르는 인간형, 자신의 존재에 충만감과 기쁨을 부여할 의미의 가닥을 잡아낼 줄 모르는 인간형 말입니다. 이 의존성과 목적의식 상실은 망국병 지경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텔레비전과 학교교육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학교교육의 근본 명제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렇게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학교를 주된 도구로 하여 권위 집중체제를 구축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솔기가 뜯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기본적인 전제들이 기계론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가정생활에 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계적 교육으로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앙갚음은 사회병리라는 현상을 통해 꼭 돌아옵니다. 마약, 폭력, 자기 파괴, 무관심,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증세들이 있습니다.
학교제도의 개혁을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들 - 독립적인 학습방법, 지역사회에서의 봉사활동, 모험과 경험, 충분한 개인 시간과 혼자 있기, 온갖 종류의 견학과 학습, 가정이라는 교육과정.
학교에서의 훈련을 교육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와 같은 조직은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가진 시간의 절반을 가둬놓음으로써,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을 저희들끼리만 묶어놓음으로써, 일의 시작과 끝은 종소리로 통제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에게 똑같은 주제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채소에 등급 매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리고 그밖에도 수십 가지 천박하고 우매한 방법으로 학교라는 조직은 사회의 생명력을 훔쳐내고 추악한 기계론만을 심어놓습니다. 그런 조직 속에서 인격을 손상당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도적 학교를 해체합시다. 교사자격제도를 없앱시다.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재주껏 가르치게 합시다. 교육이라는 사업을 개인이 일로 만듭시다. 자유시장 원리에 맡깁시다. 물론 말하기보다 행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 줄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다른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학교는 축소되어야 하지 확대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자의 학교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묻는 모든 분들에게 권합니다. 태업자가 되십시오. 강제적 제도교육의 황무지를 침식시키는 물방울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