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나무

명륜당 은행나무

샌. 2005. 11. 7. 12:26



명륜당(明倫堂) 앞마당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조선 중중 14년(1519)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두 그루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나무가 더 크다. 그런데 이 나무는 전쟁 중에 피해를 입어 가지가 일곱으로 갈아졌는데도 각각이 모두 굵게 잘 자랐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59 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은행나무는향교나 문묘 등에 널리 심어 온 나무로 우리나라 보호수 가운데 느티나무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유교와 관련된 기관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는 공자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행단(杏壇)'이라고불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행단은 일종의 야외학습장인 셈인데, 나무를 뜻하는 '행(杏)'을 은행나무로 주로 해석한 탓이기 때문이다. 은행(銀杏)에서도 같은 행자를 쓰니까그렇게 해석한들 무리는 없어 보인다.그러나 글자 자체의 뜻으로는 행(杏)은 살구나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살구나무를 심어야 공자의 정신을 잇는다는 취지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살구가 맞느냐, 은행이 맞느냐로 티격태격하는 것이 부질없어 보인다.

성균관 명륜당은 1398년에 건립된 것인데 조선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여기서 소과나 대과의 시험이 치러졌고, 가끔씩 왕이 이곳에 들러 유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동료가 추천해서 찾아간 날, 마침 나무 앞의 마당에서는 전통 혼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맞으며 하는 의식이 실내보다 훨씬 더 운치가 있어 보였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분위기가 산만한 것이 흠이었다. 앞으로 결혼식은 가까운 친지들만 초대해서 단출하게 치르는 방향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느 결혼식장에서나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나무를 보며 이양하님의 ‘나무의 위의(威儀)’라는 수필을 떠올린다. 수필의 뒷부분에는 이 나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걸엇길 한 오 분, 십 분 걷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 성균관(成均館) 안에 온 뜰을 차지하고 구름같이 솟아 퍼진 커다란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한말(韓末)의 우리 겨레의 설움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壬辰倭亂)도 겪고 좀더 젊어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시절, 나라의 준총(俊聰)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명륜당(明倫堂)에 모여 글 읽던 것을 본 기억도 가진 나무다. 이젠 하도 늙어 몇 아름 되는 줄기 한 구석에도 동혈(洞穴)이 생겨 볼상 없이 시멘트로 메워져 있지만, 원기는 여전히 왕성하여 묵은 잎새 거센 가지에 웬만한 바람이 불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품이, 쓴맛 단맛 다 보고, 청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다.

그렇다. 이러한 나무들에게는 한때의 요염(妖艶)을 자랑하는 꽃이 바랄 수 없는 높고 깊은 품위가 있고, 우리 사람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점잖고 너그럽고 거룩하기까지 한, 범할 수 없는 위의(威儀)가 있다. 하찮은 명리(名利)가 가슴을 죄고 세상 훼예포폄(毁譽褒貶)에 마음 흔들리는 우리 사람은 이러한 나무 옆에 서면 참말 비소(卑小)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이제 장미의 계절도 가고 연순(年順)의 노령(老齡)도 머지않았으니, 많지 않은 여년을 한 뜰에 이러한 나무를 모아 놓고 벗 삼아 지낼 수 있다면, 거기서 더 큰 정복(淨福)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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