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펌] 거미의 일기장

샌. 2005. 10. 2. 06:41

내가 사는 곳은 여섯 평가량 되는 방이다. 이곳에는 20여 마리의 거미들이 집을 지어 살고 있으며, 개미들의 나라가 3개국이 있다. 남쪽 모서리에 있는 개미 제국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이며, 북쪽 부엌 쪽으로 통하는 벽면에 있는 개미 제국은 최근에 건국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6개월가량 살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거미들과는 왕래를 하지 않는다. 발로 바닥을 딛고 다니는 우리와 달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생명체들도 여럿이다. 여름에는 모기와 나방들이 수도 없이 날아 들어왔고, 요즘엔 파리들이 주로 날아다닌다. 우리는 서로 먹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덫을 놓기도 하지만, 먹지 않을 것을 죽이지는 않는다.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방문이 열리고, 암컷 사람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나를 비롯한 우리 거미들은 사람이 나타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짐승은 크기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걷는 발소리가 우리들의 귀를 찢고, 그들이 걸으면서 생긴 진동에 집(거미집) 전체가 흔들린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도 허둥대고 있다. 암컷 사람 한 마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청소를 한답시고 방 구석구석을 쓸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학살이었다. 빗자루라는 커다랗고 거친 물체가 한 번 스쳐갈 때마다 두세 마리의 거미들이 죽었고, 암컷 사람이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대 여섯 명의 개미가 죽어나갔다. 암컷 사람은 마침내 방 전체를 쓸어내었다. 암컷 사람이 쓰레기라고 모아놓은 데에는 백여 명의 개미와 이십 명 가량의 거미가 있었다. 개미 가운데 산 자들은 오십 명쯤 되었고, 거미 가운데 산 자는 세 명이었다. 나는 암컷 사람이 가까이 올 때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고, 천정 형광등 위로 올라갔다.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지만,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는 없었다. 생각할수록 살인의 형장은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방어할 수조차 없었다. 아직껏 개미나 거미 백여 명을 한꺼번에 먹어치운 짐승은 없었지만, 나는 암컷 사람이 그 많은 개미와 거미를 한꺼번에 먹어 치울 줄 알았다. 암컷 사람의 덩치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컷 사람은 그 많은 목숨들을 커다란 비닐 봉투에 먼지들과 함께 쓸어 담고 말았다. 학살은 거기에서 멈춰지지 않았다. 암컷 사람은 벽에 끈끈한 액체를 바르더니 커다란 종이로 벽을 덧발랐다. 그 와중에 수십 명의 개미가 죽었으며, 나도 끈끈한 액체에 발이 닿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개미들의 페르몬 길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방바닥에는 두툼한 장판이 깔렸다.


암컷 사람 한 마리가 가고 난 며칠 뒤 여러 마리의 사람들이 짐을 들여 놓았다. 거미들이 집을 짓곤 했던 벽면에는 책장이라는 물건이 빼곡히 놓였고, 방의 여기저기에는 컴퓨터며 텔레비전 같은 것들이 놓였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수많은 개미와 거미를 죽이거나 다치게 했던 여러 마리의 사람들이 가고 나자 한 마리의 수컷 사람이 남았다. 수컷 사람은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더니 잠이 들었다. 몇 명의 개미들이 수컷 사람을 공격 했는데, 끄떡없었다. 몇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개미 왕국들은 사람과 공존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어차피 어떤 공간 속에서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 수 밖에 없다. 시간의 주인이 없듯이 공간 또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컷 사람이 여러 날 방에 와 음식을 먹고 잠을 잤지만, 방 안에 있는 것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나중에야 수컷 사람이 가지고 온 물건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은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수컷 사람이 가지고 온 것들은 죽은 나무에 나쁜 접착제나 칠을 한 것이거나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은 이상한 짐승이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


수컷 사람은 수시로 청소라는 것을 하는데, 노란 테이프를 사용하여 개미들을 집단으로 죽인다. 수컷 사람이 테이프를 방바닥에 대고 한 번 문지를 때마다 페르몬 길을 걷고 있거나 먹잇감을 운반 중인 개미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다. 그런 학살은 대개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방바닥에 나와 있는 개미 수백 명이 살해된 적도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렇게 죽인 목숨을 먹이로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먹을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다니고, 먹지도 않을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으깨어 버린다.


수컷 사람을 찾아오는 몇 마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컷 사람은 그들에게 이 방을 자신의 방이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 방이 자기만의 것이란 말인가.


개미가 되었건 모기가 되었건 수컷 사람 눈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수컷 사람은 파리나 모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 장벽을 설치해 놓았다. 거기다가 이따금 뿌려대는 독한 약 때문에 나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 또한 살기 위해 여러 생명을 죽였다. 개미들도 많은 생명을 자신들의 먹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먹지도 않으면서 다른 생명을 죽이지는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 '작은 것이 아름답다'(9월호), 이대흠 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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