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샌. 2005. 9. 10. 10:08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옆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나이가 들수록 대체로 여자들이 남자보다 현실적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귀농이라든가 도시 생활을 청산하는 꿈을 꿀 때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한 남편이라고 구박 받기 일쑤다. 여자들은 확실히 현실적이고 도시지향적이다. 무비판적인 현실 안주, 안락함에 대한 추구, 비교 우월의식, 또는 자식에 대한 집착 등에서 여자의 삶의 태도는 남자보다 더 집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맹모삼천(孟母三遷) 같은 모성의 힘이 이 세상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본다면 할 말이 없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많이 개선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질 것이다. 도리어 지나친 사회 참여에 대해 우려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주류 사회에 들어가 당당히 살아가는 여성의 숫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세상살이에서 내팽개쳐 버린 낭만적 꿈의 상실이다. 주말 연속극 수준으로 낮아진 유치한 의식의 문제이다.

 

무거운 세상을 모두 날려보낼 듯한 16세 소녀의 명랑한 웃음은 어디로 흩어졌는가? 파란 하늘과 같았던, 솜사탕 같이 달콤한 꿈으로 가득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갔는가? 그 많던 여학생들과 함께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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