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지율 스님

샌. 2005. 1. 23. 20:12

지율 스님의 소식이 안타깝다.

 

80여일의 단식 중에 홀연히 잠적해서 가까운 사람들도 그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지난 번 법원 판결 이후 스님이 내건 조건도 많이 완화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부 측에서는 '법대로'를 외치며 무시해버리는 듯해서 더욱 우울하다.

 

스님의 단식에 대해 일부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천성산이라는 지역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스님이 말하는 대로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자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아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고 또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생존할 수도 없다. 그런데 현대 문명과 인간이 가진 힘은 이제 자연을 이용하는 정도를 넘어 자연을 훼손하고 뭇 생명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젠 그런 예를 드는 것조차 진부해져 버렸다.

 

마치 몸의 일부분이었던 세포가 어느 날 암세포로 변해 원생명을 파괴해 버리듯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이 어느 순간 자연을 유린하는 난폭자로 변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다. 며칠 전 미국의 부시 대통령 취임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자유’였다고 한다. 무려 서른 번 가까이 인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보도를 접하는 순간 내 과민반응인지는 모르지만 온 몸이 섬찟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라크인의 자유를 위해서 했다는 이라크 침공, 그리고 미국이 내세우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의 자유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힘없고 약한 것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무한 경쟁 체제에서는 가진 자들은 더욱 부를 누리게 되고 없는 자들은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도 그저 경제적 관점에서 하나의 이용 대상일 뿐이다.

 

최우선적 가치가 물질적 풍요라면, 그리고 행복도 거기서 얻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연이 파괴되든 말든 상관없을지 모른다. 또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잖아’하면서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지율 스님 단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간 우리는 너무나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서운한 것이 많다. 이 정권 출범 초기에는 뭔가 우리 사회에 새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 기대도 많았지만 지금은 실망이 크다. 개혁도 흐지부지되고 경제도 다시 성장주의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환경 정책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사실 경부고속철의 천성산 관통은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환경 영향 평가가 실시되었어야 하는데 경제적 논리에 밀려서 환경 단체의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사실 원론적 관점에서는 경부고속철이 과연 타당한 사업이었느냐 하는 것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이제 와서 우회 노선을 택한다 한들 또 그쪽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논란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라도 이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텐데, 개발과 성장 중심 정책을 취하는 한 앞은 캄캄해 보인다. 나라의 경제 회복을 위해서 제일 유효한 것이 건설 경기를 진작시키는 것이라는데 그래서 괜히 쓸데없이 산하를 파헤치는 짓거리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예산을 더 따내기 위해서 일부러 산허리를 깎고 도로를 만든다는 얘기도 들린다.

 

스님의 단식에 대해서 목숨을 담보로 거는 행위가 너무 극단적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것에 대해 며칠 전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죽임을 당하는 생명들 앞에서 내 방법은 전혀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내 단식하는 몸을 보지 말고 산하의 아픔을 봐 주세요. 너무나 잔인하게 생명을 죽이는 인간의 행위나 생각을 보면 그게 더 극단적이지요. 나를 보지 말고 내 뒤에 있는 생명의 아픔을 봐 주세요. 내 몸보다는 저 말라가고 있는 산하를 걱정해 주세요.”

 

우리는 우리가 파괴하는 저 생명들의 아우성에 귀를 막고 있던가, 아니면 볼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청맹과니일 것이다.

그리고 스님의 단식에서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옛날 월남전이 한창일 때 반전과 평화를 외치며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하던 월남 승려들의 모습이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저 미친 중들이 한 마음으로 싸워도 될까 말까한데 전쟁 반대를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르다니 뭔 짓이냐고, 무척 어리석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양심과 원칙의 문제다.

 

그래도 나는 지율 스님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살아남아서 자연과 생명들을 위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고 바른 행동을 해주시길 바란다. 거대한 수레바퀴에 맞서서 장렬히 전사하기 보다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연대해서 함께 작은 둑 하나라도 쌓아 저 맹렬한 속도를 떨어뜨리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의미있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희덕 님의 ‘천장호에서’라는 시가 생각난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얼어붙은 호수는 차갑고 단단하다. 봄의 훈풍은 언제일지 기약이 없다. 각자가 던진 돌멩이는 빈 메아리만 울리며 미끄러져 갈 뿐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호숫가에 여러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함께 들어올린 바위가 단단한 얼음을 찍는 소리가 푸른 숲으로 퍼질 날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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