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소의 전설

샌. 2005. 1. 13. 14:33

'작은 것이 아름답다' 1월호에서 옛 생각이 나게 하는 글 한 편을 만났다. 상주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오덕훈 님이 소에 관하여 쓴 '소의 전설'이라는 글이다.

 

40대 이상으로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에 얽힌 추억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농기계가 보급되지 전의 농촌에서는 힘든 일에는 반드시 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집이라면 집집마다 일소가 있었고, 가족처럼 대접받았다.

 

우리 집에서는 덩치가 큰 황소를 길렀다. 많은 논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성질도 사나워 그 소를 부릴 수 있는사람은 우리 집 일을 주로 도와주던 손씨라는 사람 외에는 없었다. 그때는 온순한 암소를 기르는 집이 무척 부러웠다. 우리 소를 몰고 소띳기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처럼 소를 방목하지는 않았고 풀이 많은 곳에 고삐를 길게 해서 묶어두면 자기가 알아서 풀을 뜯어먹거나 쉬거나 한다. 실컷 놀다가 장소만 이동시켜 주면 되었다. 놀면서 하는 일이 바로 이 소띳기는 일인 것이다.

 

소는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으로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들어서던 소 목에 걸린 방울 소리, 사랑방 가마솥에서 흰 김을 내뿜으며 끓던 소죽의 구수한 냄새, 논에서 힘들게 일하던 소의 지친 모습과 순한 눈망울 등....

 

그리고 소가 우는 모습을 보고 같이 마음이 아팠던 기억도 있다. 늙어서 노동력이 떨어져 팔려 나가는 소가 동구 밖을 빠져 나가며 구슬피 울던 울음 소리도 떠오른다. 이제는 이 모든 일이 글 제목처럼 전설이 되었다. 소는 사육장에서 길러져서 인간의 단백질 공급원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사람과 소 모두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살았던 그때가 그립다.

 

다음은 오덕훈 님의 글이다.

 

‘천석꾼도 소가 반 짝’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농촌에서 소는 재산이기 전에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그러니 소를 먹이는 것도 사람 못지않게 귀하게 대접하여, 마치 한 가족처럼 대했다. 보통 살림의 집에서는 한 마리를 먹였는데, 집집마다 한 칸씩 소가 사는 마구가 있었고, 그 가까운 곳에 가마솥을 걸어 둔 쇠죽솥이 있었다. 이 쇠죽을 끓이는 부엌을 ‘가뭇정지’라고 불렀는데, 가마솥이 걸린 정지라는 말이리라. 정지는 요즘 말로 부엌을 가리키는데, 사람의 밥을 준비하는 곳을 그냥 정지라고도 하였지만, 가뭇정지에 상대적으로 부를 때는 ‘안정지’라고 하였다. (부엌이란 말이 지금처럼 주방의 뜻으로 쓰인 지는 얼마 되지 않는데, 부엌은 ‘부석’ 또는 ‘붜억’라고 하여 요즘말로 아궁이를 이르는 말이었다. 부엌이마, 부엌 아가리, 부엌 고레 등의 말처럼.)

 

농촌에 농기계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를 살 형편이 안되는 집에서는 배냇소를 먹였는데, ‘배내준다’는 말은 이렇다. 어떤 집에 소가 두 마리가 되면 다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먹이기도 힘들다. 그 때 소가 없는 집에서 이 소를 데려다 기르는 것을 말한다. 조건은 대개 기르는 집에서 먹여 키우면서 길을 들여 일을 시키고, 일년 뒤에 큰 소는 돌려주고 그 소가 낳은 송아지를 팔아 반반씩 가른다. 소 임자는 소를 남의 힘으로 키울 수 있고, 소 없는 사람은 일소를 얻고 송아지의 반을 얻을 수 있었으니, 서로 좋은 것이다. 이렇게 몇 년을 하면 소를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소뿐만 아니라, 닭도 배내닭이 있었는데, 닭의 경우는 병아리 달린 닭을 한 배 주면 일년 뒤에 큰 닭과 병아리의 반을 주인에게 주고, 키운 사람은 병아리의 반을 받았다. 배냇소를 먹이는 것은 그나마 소 주인이 인심을 쓰는 것으로 알았다.

 

내가 어렸을 적엔 여름한철 소 뜯기는 일이 하루의 절반 일이었다. 상주말로 ‘소띳기로 간다’고 하였다. 여름 방학 할 때쯤이면 늦모내기도 끝나고 산에 풀이 우거질 때다. 본격적인 소 뜯기는 철이 되는 것이다. 한 여름 대낮을 동네 개울에서 풍덩거리며 놀다가, 점심 먹고 한 숨 자고 났을 때쯤에 집집마다 소를 몰고 말방간으로 모인다. 말방간이란 옛날에 말방앗간(연자방앗간)이 있었던 곳으로, 새마을 사업으로 길을 넓힌다고 옮기기 전까지도 연자석 두 개가 남아 있던 마을 한 복판 조금 너른 곳이다. 그곳에 온 동네 소가 모이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여 그곳으로 간다. 우리 마을에는 소를 올리는 곳이 여러 곳 있어서, 날마다 돌아가며 다른 곳으로 갔다. 소통골, 불당골, 송골, 작은 송골, 미골, 점디기밭골, 앞산, 빨쥐바우, 황장골, 큰골 등이 주로 가는 곳인데, 비 오는 날은 무조건 앞산이나 그 옆의 빨쥐바우로 갔다. 그 때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비 오는 날은 날이 빨리 어두워지므로, 그나마 어둠이 가장 늦게 오는 서향의 앞산으로 간 것이 아닌가 싶다.

 

소를 몰고 갈 때나 몰고 올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길 옆 논의 나락이나 콩을 훑어 먹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농로가 지금처럼 넓지 않고 오솔길이던 당시에, 코 앞에 있는 나락이나 콩의 맛있는 유혹을 소가 뿌리치기 어려웠으리라. 한 잎 뜯어 물면 얼른 고삐를 당기고 고삐로 엉판을 후려치지만, 대부분 길가의 나락은 제대로 결실을 못하기 일쑤다. 주인의 벼락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목적지에 이르면 소목을 감는다. 고삐를 목에 감아 묶어 두어야 소가 다니기 편하고 서로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산으로 몰아 올린다. 소가 저희들끼리 패를 지어 다니며 이 골짝 저 골짝을 다니며 풀을 뜯어 먹다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을 마시며 노는 것이다. 소를 감아 올려놓고 나면 그 때부터는 대부분 자유시간이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씨름을 하거나 편을 나누어 여러 가지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좀 많은 형들은 아랫 아이들을 괜히 싸움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마을에서도 비슷한 또래 사이에는 누가 누굴 이기고 지는 관계가 다 있었다. ‘니가 야 이기나?’하고 한 쪽에 물어 놓고, 다른 쪽에다 다시, ‘야가 너 이긴다는데 너는 지나?’하고 서로 자존심을 건드리며 약을 올리면, 이건 하기 싫어도 백발백중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동네에서도 유독 싸움시키고 구경하길 즐기는 짓궂은 사람이 있어, 거기 걸리면 억지로라도 싸워야 하는 재수 없는 날이다. 그렇게 싸움을 붙여 놓고는 또 적당한 때에 말리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한 번 찍혀 싸움을 하다가 기세가 팽팽하게 끝나면, 이튿날까지 이어지고 심지어 며칠을 가며 하는 수도 있었다.

 

또 소를 올려놓고 하는 일 가운데 잊을 수 없던 일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당시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 와 사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엄청난 독서를 하신 분인데다가 입담마저 성우 못지 않았다. 날마다 산에 가면 그 주위에 몰려 앉아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루에 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날을 이어가며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긴 이야기는 수호지, 삼국지 같은 중국 고전 소설 내용이었고, 짧은 이야기는 전래 야담과 같은 것이었다. 동네 라디오도 몇 대 없던 시절에 이야기를 듣는 것은 대단한 재미였고, 소 뜯기로 가는 것이 기다려 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소 풀을 한 짐 해놓고 놀 수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또 싸리를 몇 단씩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요즘은 산이 우거져 싸리나무가 많이 없지만, 당시엔 사방사업으로 싸리나무를 많이 심었기에 싸리가 많았다. 쪽 곧게 자란 싸리나무를 베어 잎을 훑어 내고, 칡넝쿨로 아래위를 묶어 등에 지고 다니며 백 개가 되면 한 단이라고 묶었다. 이것으로 발을 매거나 주로 바소고리(지게에 얹어 짐을 실을 많이 실을 수 있게 하는 도구. 서울사람 말로 한다면 ‘바소쿠리’ 쯤 될까)를 만들었다. 이렇게 아들이 싸리를 베어오면, 집에서는 어른이 바소고리를 만들어 장날 내다 바치는 것이다.

 

산그늘이 어디 쯤 오면, 이제 산에 올라가 소를 훌쳐 내러 가야할 때다. 몇 군데로 나뉘어 올라가 ‘핑그랑’(소 목에 거는 방울)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어느 집 소를 가릴 것 없이 아래로 몰아 내린다. 대부분의 경우 패를 지어 몇 마리씩 몰려다니기 때문에 쉽게 훌쳐 내릴 수가 있고, 배가 부른 소들도 쉽게 내려온다. 올려 보냈던 곳으로 내려와,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몇 사람이 소목에 감았던 고삐를 풀어 놓으면, 모두 내려와 자기 소를 확인하고 배를 두드리며 흐뭇해한다. 배부른 소가 흥이 나서 이리저리 뛰며 저희들끼리 장난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은 풍경이다. 조금 일찍 내려온 날은 소싸움도 부치고, 소등에 올라타는 시합도 하며 여흥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만일, 어느 집 한 소가 보이지 않으면 야단이 난다. 소를 몰고 온 주인은 물론이고 일행 모두의 공동 책임이다. 다시 올라가서 곧 찾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 자리서 찾지 못하면, 마을에 연락해 온 동네 어른들이 등불을 들고 찾아 나선다. 한 해 여름에 이런 일이 꼭 서너 번씩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일이 잦다 보니 소와 사람에 얽힌 옛날이야기도 많았다.

배가 부른 소를 몰고 삽짝을 들어 설 때는, 가슴도 뿌듯했다. 여름에는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마답이라고 하여 마당 한켠에 소매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재웠다. 보통은 밤에 논둑 깎은 풀이라도 한 짐 져다 그곳에 부려 놓으면 밤새도록 소는 그 중에 풀을 골라 먹기도 하고, 밟아 거름을 만들기도 하였다. 풀을 한 잎 물면 소는 어김없이 고개를 뒤로 한 번 휙 제끼는데, 이것은 등에 붙은 파리를 쫓는 행동이다. 풀이 입에 달려 있으니, 맨 잎으로 하기보다 그 범위가 더 넓어져서 꼬리 쪽에 있는 파리도 쫓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쟁쟁한 ‘핑그렁’ 소리가 듣기 좋게 울리곤 했는데, 그 소리는 또 소가 그 자리에 있으며 건강하다는 표시이기도 하였다. 밤새 울리는 ‘핑그랑’ 소리, 나는 그 정겹고 믿음직한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름 마당에 피우는 모깃불은 소를 위해서도 한자리 더 피워 주었다.

 

요즘은 소를 기르는 집도 줄어들었지만, 소를 옛날처럼 먹이는 집도 보기 힘들다. 더구나 온 동네가 모여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소 뜯기는 일은 전설이 되고 말았다. 산이 우거져 산풀도 많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소를 먹일 사람도 없고, 필요도 없다. 소 뜯기는 일을 통해 소도 사람도 우리 마을 산의 구조를 샅샅이 익혔고, 어디에 무엇이 나고 있는지도 자세히 알았다. 온 산을 휘젓고 다니던 그 당시의 소들은 일은 힘들었을지 몰라도, 일 년의 한철은 그렇게 멋있게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즘 소는 할 일도 없는 대신 딱딱한 우리에 갇혀 사육된다. 기름진 배합사료에 살만 찌우는 고기 덩어리로 만들어지지 않는가. 어찌 보면 불쌍한 짐승이 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것이 어찌 요즘 소들뿐이겠는가. 사람은 그에 비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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