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극단 '여의도'

샌. 2004. 8. 30. 14:10

7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선배 한 분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날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는데 집에 들어오지를 않은 것이다.

인품이 워낙 중후하고 동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신 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했다. 주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엉뚱한 일을 저지를 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하고 직원들이 가족과 함께 이리저리 찾아다녔지만 도대체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나갔을 때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유가 궁금했지만 이상하게도 모두들 입을 닫으며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선배님 집에서도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가 며칠 지나고 나서야 대체적인 진상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도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거치며 퍼져나간 소문으로서였다.

그날 밤 선배가 술에 얼근하게 취해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시국 상황에 대한 불만을 기사에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유신 말기로 음양으로 탄압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모두들 말조심, 행동조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 기사가 그냥 바로 경찰서로 택시를 몰고 가서 선배를 신고해 버렸다. 아마 국가 원수 모독죄쯤 된 모양이다. 뒤에 들어본 바로는 별 것도 아닌 내용이었는데 아마 이 택시 기사는 포상으로 나오는 개인 택시 면허증에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사람들은 판단했다.

선배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이 어떤 의도적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죄목을 붙이고 처벌할 수도 있었다.

선배는 감옥에는 가지 않았지만 공직은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후배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받던 선배님이었는데 그 분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술 마신 뒤의 객기로 뱉은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다. 당시는 그렇게 무서운 시대였다.

오늘 신문을 보니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여의도'라는 극단을 만들고 직접 연극을 했는데 그 내용이 현 대통령을 지나치게 모욕하는 것이어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대통령을 빗대서 '노가리'라 부르고 "사내로 태어났으면 불알값을 해야지. 육시럴 놈, 죽일 놈 같으니라구." "그 놈은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야."같은 대사는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보면서 박장대소하고 즐거워하며 수준 높은 연극이라고 치켜세우는 대표의 언행 또한 영 탐탁치가 않다.

대통령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지만 비판하더라도 거기에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을 것이다. 뒷골목에서나 들을 법한 육두문자를 써가며 질타하는 모습에 통쾌감을 느낄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자신에게 스스로 침 뱉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 같다.

20여년 전 취기 중에 한 말 실수 하나로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난 선배가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당시의 대통령님 영애께서 맨 앞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며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씁쓰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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