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낙관과 비관

샌. 2004. 6. 18. 14:25

친구가 몇 년 전에 베트남에서 근무했다.

그때 우리 사이에는 많은 메일이 오갔는데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 당시 주고받았던 메일들 중에서 하나가 눈에 띈다.

친구와 나는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친구는 낙관적이고 나는 비관적인 편이다. 친구는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나는 비판적이다. 그런 면에서 가끔씩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느 날 친구가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창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문득 잠이 깬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 위로 야자수잎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아. 오늘은 일요일이지" 그냥 누운채로 움직이지 않고 모처럼의 여유를 느껴본다.
「이곳이 어딜까? 물론 베트남이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르지. 꿈일지도 몰라. 내가 지금 베트남에 있다는 것이.. 꿈을 깨면 아마 잠실의 아파트에서 예전처럼 한강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꿈속 일을 생각해 보겠지. 정말 꿈이라면...」
벌떡 일어나 거실을 한바퀴 돌고 조수미CD를 넣고 13번을 선택하고 repeat를 누른다. 아마 백 번 정도는 들었을, 아무리 들어도 좋은, 아마도 나를 베트남으로 유혹했을지도 모르는 목소리. 너무 아름다워서 지상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어떨 때는 감동으로 까닭 없는 눈물을 고이게 하는 천사의 목소리.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청명(淸明)한 저 하늘로
날개 치며 날아 갔다네

P군. 해맑은 하얀 얼굴에 연약한 귀공자처럼 보이지만 축구공을 몰며 달릴 때에는 어린 축구황제. 바람처럼 수비수들을 제치며 달릴 때 얼마나 행복할까. 그 화사한 용모와 침착함, 민첩성 등으로 아마 청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꺼야. 멋있는 청년이 되겠지.


자스민 향과 태양이 부르는 고장으로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Mr. V. 수줍어하면서도 공손하고 항상 나와 맑은 눈을 마주하며 인사하는 젊은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을까. 그는 미래에 대하여 어떤 포부를 갖고 있을까. 혹시 하루하루를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의 여자친구와는 어떤 대화를 주고받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모르는 채 지내도 괜찮아.


이 여행자의 비상(飛上)을
나의 시선은 오랫동안 좇았다네
그 후로 꿈꾸는 나의 영혼은
제비와 동행하여 하늘을 난다네
아 신비로운 고장으로


K군의 어머니. K군을 자유 분방하게 키우시는 것 같으나, 그러나 올바른 젊은이로 만들어 나가는 솜씨 좋은 학부모님. 선생님들의 어려운 처지를 열심히 변호해 주시고 복지 문제를 역설하시는 분.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yes 라고 고개를 끄덕일 때 혼자 no! 라고 고개를 좌우로 저을 줄 아는 멋있는 분. 그래! 참 재미있고 좋은 분이야. 그런 분이 나의 학부모이고 내가 언제든지 대화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큰 행복이야. 언젠가 내가 구수하고 따뜻한 베트남커피를 분위기 좋은 shop에서 대접할 수 있을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그리곤 나도 새와 같은 길을 따르고자 했다네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날개 치며 날아 갔다네


A선생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참 훌륭한 선생님이십니다. 학생이 사랑스러워 어쩔줄 모르시는 분.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한히 행복해하시는 분. 총명한 아이는 총명한대로 키우시고, 부족한 아이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랑과 애정으로 지도하시는 분. 감사합니다. 당신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는 아이들은 참 행복한 아이들입니다. 당신과 같은 좋은 교사와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참으로 행복으로 여깁니다.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저 청명(淸明)한 아침하늘로
날개 치며 날아 갔다네
자스민 향과 태양이 부르는 고장으로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프레데릭 반 데르 엘스트」의 시 목가(Villanelle) 중에서


창 밖의 야자수 잎이 시원하게 바람을 일으킨다. 서유기에서 나오는 우마왕의 부인이 휘둘렀음직한 파초잎들도 세차게 흔들린다. 아차!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이 너무 흘렀네. 아이들을 깨워야 하니까. 일요일이지만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아침을 먹고 이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지으신 분께 찬양하러 가야하니까.



이 메일을 받고 같은 형식을 빌러 바로 메일을 보냈다.

마침 전날의 술자리 얘기를 적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친구의 톤과는 무척 대조가 된다. 간단한 메일이었지만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이 친구와는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친구를 철없는 낙관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친구는 나를 대책없는 몽상가라고 한다.


장미상가 지하에 삼겹살 집이 있지. 거기는 직장 동료들의 퇴근후 단골집이네. 홀 넓이라야 우리 집 안방 정도밖에 안 되는데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된다네. 어느 때는 들어가지 못해 발길을 돌리기도 하는데, 어깨 부딪치며 왁자지껄, 자욱한 담배 연기, 사람들은 무엇이 좋은지 항시 이 집만 만원이네. 삼겹살이 맛있고 우렁된장찌개가 일미라고 하지만 사람들을 끄는 매력은 다른데 있지. 삼겹살 집과 미스 코리아 대회 경력(?)의 주인 아주머니,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가 있다네. 조금은 냉정해 보이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또 정성스레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집이지. 쇠붙이가 지남철에 끌리듯, 사람들을 잡아 당기는 이 미묘한 힘. 어제는 직장 동료 둘과 이 집에서 오랜만에 소주를 했네. 사양하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하며 한 6병쯤 비우고 일어섰을까?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볼 일을 본다고 간게 술이 취해서 여자 화장실로 들어 갔네. 소변기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미즈쯤으로 보이는 여인네가 들어오더군. 아차 잘못되었구나 했는데 그분의 말씀이 술을 깨게 만들었어. "할아버지!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예요." 왜 금년 들어서는 유난히 할아버지 소리를 많이 듣는 거야?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이젠 화장실에서까지. 가게 유리창 앞에 한참을 서서 보았지. 피곤한 내 모습을.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차는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했지. 안주로는 나의 여주행이 탁자 위에 올랐네. 두 사람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 '패배자' '도피자' '완전히 돌아버린 사람'의 화살들이 쉼없이 날아왔네. 차라리 장렬한 전사를 택할텐데 나도 참지 못하고 독화살을 날려 보냈지. '속물들'이라고. 내가 옳다고, 니가 그르다고 해답없는 논쟁의 늪에서 허덕였다네. 그래도 서로간에 악의는 없었으니 술 먹은 김에 평소 하지 못한 말들을 내쏟은 셈이지. 마음 속에 품은 것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잖은가.


이빨이 억세며 뭇 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핍하고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L은 마침내 쓰러지는군. 택시 안에서도 정신이 없더니 집 앞에 내려서는 다시 소매를 당기네. 자기 집에 들어가서 술 한잔 더 하자고.
요사이는 컴퓨터로 비틀즈를 자주 듣고 있네. 그 중에서도 가사 때문에 'Let it be'를 즐기는 편이라네. 술에 취해서 생각나는 노래,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노래.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until tomorrow, Let it be...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술에 취해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고도 서글프군. 자네가 서울을 떠났듯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겠지. 그래도 한강물은 계속 흐를 것이고, 별은 반짝일 것이고, 사람들은 똑 같이 사랑하고 헤어지겠지. 저 세상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에서 걸었던 흔적들은 어떠할까? 장자는 우리 인생을 大夢이라고 표현했지. 인류의 스승들 가운데 한 사람, 그가 가르키는 대자유인의 길, 길은 놓아두고 그의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 하나가 제 집을 찾아 비틀거리며 가고 있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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