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명함

샌. 2004. 6. 1. 12:53

한국에서 근무하던 인도인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그 동안의 한국 생활에서 가장 난감했을 때가 명함을 가지지 않고 외출했을 때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이 서툴러서 명함이 없으면 자기 소개가 잘 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명함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한국 사회의외피 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명함인 모양이다. 어떨 때는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불쑥 명함을 내밀어서 이상할 때도 있다.

서로 초면의 인사를 나누면서 명함을 받기만 하고, 줄 명함을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없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나 아니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명함에다가 온갖 직함을 수두룩하게 적어놓고 상대방을 주눅들게 만드는 몰염치한 버릇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나는 이런 이런 껍데기의 사람이요 하고 자랑하는 것 같다.

명함을 받게 되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직장과 직위이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위치와 비교하게 된다. 이어서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뒤따른다.

사람을 사회적 위치나 직위로 평가하는 무의식적 습관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 같다.

가끔씩 동창회에 나가보면 자랑스럽게 명함을 내미는 친구와 건네줄 명함조차 없는 친구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명함이 없다는 것은 거기에 적을 화려한 장식품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초 직장을 옮겼더니 여기서는 명함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무심결에 신청했더니 정말로 내 명함이 나왔다.

직장 생활 30년에 처음 가져보는 명함이다.

그동안 명함없는 설움(?)을 긴 시간 겪어왔는데 이제야 벗어나는가 싶어 한 통 가득 들어있는 명함을 꺼냈다 넣었다하며 감격했다.

몇 장은 사람들에게 줄 요량으로 수첩에 넣어두었다. 악수를 한 다음에 상대가 명함을 준다면 나도 폼나게 명함을 꺼내서 건네줘야지.

그런데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한 장도사용하지는 못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동안 명함 없어도 불편함 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명함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자 수첩에 들어있는 내 명함이 슬그머니 불쌍해 보이기 시작한다.

휴대폰도 없어 이름과 집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있는 내 초라한 명함, 어느 한 사람 손에 건네지지도 못한 채 아마도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려나야 할 신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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