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샌. 2004. 5. 11. 17:42

한미르 커뮤니티에 김정란 님의 '현대시 읽기'라는 칼럼이 있다.

몇 번 게재되다가 지금은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아쉬운데, 옛 글 중에서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어 옮겨 본다.

김정란 님은 언젠가 TV 프로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인이 정치 토론 프로에 나온게 특이해서 유심히 지켜 보았다. 보수쪽 공격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눈이 느껴졌는데 이 글에서도 비슷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고, 우리 부모님도 불쌍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하다.'

나에게도 그런 느낌이 가끔식 찾아와 가슴이 아려지는 요즈음이다.

누구든 자기 한 몸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지요. 조금씩 그 고통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만큼씩 또 애를 써가면서 말이지요.

어떨 때는 사람들이 모두 물 속에서 방금 나온 오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뒤뚱거리면서, 날개에 묻은 물을 털어내느라고 수선을 피울 때의 오리 말예요. 그러는 오리를 지켜보고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사람들은 모두 그런 오리 같아요.


그렇게 말문을 열고 보니, 스무 살 무렵의 제 남편(물론, 그때는 남자 친구였지만요)이 제게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인가,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어 밖으로 나왔더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빗방울이 하나, 툭, 하고 머리 위에 떨어졌는데, 그 빗방울이 그냥 몸을 뚫고 발끝까지 닿는 것 같더래요. 아무 저항도 없이, 그렇게 자기 몸을 순하게 지나서 땅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같더래요.

그런데, 불현듯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고, 우리 부모님도 불쌍하고, 세상사람들 모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아마도 젊은 제 남편은 그때 빗물이라는 하늘의 전령으로부터 조그만 신탁을 받았던 게지요.

사람들의 운명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땅에 이르고, 땅에 스며들었다가 강이 되고, 이윽고 바다에 이르렀다가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고, 다시 후두득 땅으로 내려와 똑같은 연속성의 운명에 참여하는 물과 같은 것이라는 것. 그 연속성의 영원회귀 안에 인간의 육체가 구체적인 시간의 지속을 구현하는 매체로 잠시 위치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몸을 받는 일 자체가 가여운 일이라는 것.

물론, 스무살 무렵의 젊은이가 그런 생각을 한꺼번에 했던 것은 아니지요. 그냥, 저는 오랫동안 그의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었을 뿐입니다. 그의 부서질 것처럼 가느다란 육체가 순하게 받아들였던 그 물방울의 이미지도 함께. 참, 착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그 말은 지금도 내 마음 밑바닥에 아주 부드럽고, 얇고, 찢어지기 쉬운, 엷은 미색 명주 보자기처럼 덮여 있습니다. 그 보자기를 들추면, 어쩌면, 무수한 해골들이 나올지도 몰라요.

어려서 죽은 아기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기 위해서 자기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다가 불에 타죽은 이교도들, 강간당한 여자들, 아우슈비츠에서, 킬링필드에서, 여수에서,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 벌써 눈물이 그 명주천 위에 툭툭 떨어집니다. 그렇게 실컷 죽이고도 모자라서, 비행기를 몰고 빌딩에 처박히고, 또 처박은 사람들을 응징한다고, 초현대 무기들을 가지고 허허벌판인 나라를 초토로 만들고, 아이들과 여자들마저 죽이고.....

21세기도 비참한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류는 도무지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그 말은 나지막한 바람처럼 불어옵니다. 오리들은 그 바람 아래에서 푸르르 날개를 털어요.

서쪽 하늘이 문득 어두워져요. 오리들은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뒤뚱거리는 걸음을 우리는 <자기만큼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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