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선거 이틀 전

샌. 2004. 4. 13. 14:57
총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 분위기가 전에 비해 차분해진 것 같다.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만 선거일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생활에서 체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평소 정치에 무관심하던 사람도 정치 얘기 한 두 마디는 거들 정도는 되었다. 역시 선거는 바람을 잘 타야하는 건지 무슨 풍, 무슨 풍에 민심이 왔다갔다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한 때는 구태의연한 썩은 정치판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도 했다. 특히 탄핵 사태의 충격이 그런 바람에 불을 지펴서 그 열기는 전국을 휩쓸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고개를 드는 지역주의 앞에서 촛불의 빛도, 변화의 바람도 슬그머니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넘을 수 없다고 한다.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막상 투표할 때가 되면 다시 똑 같은 사람들을 의사당으로 보내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지독한 이기주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바보가 되어 버린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는 분별력 있고 이성적이지만, 그러나 군중 속에 있으면 멍청이가 된다.`

지금의 선거판에 부는 미망의 바람을 생각하면 이 말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멀쩡하던 사람이 예비군복을 입은 집단 속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지역주의의 망령이 이렇게 두려운지는 꼭 선거철이 되어야만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이번 선거는 관심의 대상이다. 결과가 어찌되든 희망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기 때문이다. 다만 싹이 트는 때가 문제일 뿐이다. 가치있는 것은 손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선거라면 나에게는 몇 가지 슬픈 기억이 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님이 공직 생활을 오래 하셔서 몇 번인가 선거를 치른 경험이 있다. 주로 어린 시절의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선거 때의 분주함과 가족들의 안절부절, 그리고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분위기는 어렴풋이 감지된다.

4.19 뒤에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선친께서 작은 시골의 직선 면장 선거에 출마하셨다. 개표가 끝난 밤에 집으로 당선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만세와 박수 소리, 그리고 음식을 장만하고 왁자지끌한 분위기는상대쪽 지지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온다는 소식에 풍지박산이 되었다.
그 날 밤 어른들을 따라 부리나케 옆집으로 도망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어두운 방 구석에서 뭔지 모를 두려움에 떨었다.

선거에 대한 냉소적 태도는 그런 경험에서부터 생겨났는지 모른다.
검은 음모, 꺼림찍한 승자의 웃음, 억울한 패자의 눈물, 명분뿐인 공약, 개인적 영달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다.
어른들은 주기적으로 왜 그렇게 어리석은 싸움질을 해야 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중우정치(衆愚政治)라는 말을 만났을 때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차라리 추첨으로 지도자를 결정하는 것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더 나아 보였다.

지금의 선거전도 겉으로만 세련되었을 뿐 예전과 본질적 면에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는 원시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지금은 교묘한 트릭과 위장술로 조작된 이미지에 속기가 쉽다.
정치 TV 광고를 보면 진실을 전하기 보다는 고도로 발전된 포장술과 위장술을 보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더욱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된다.

그래서 더욱 투표장에는 가야 한다.
나도 한 때는 기권도 의사 표시의 하나라며 그들만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각자의 촛불을 높이 들어야 한다.

비록 수 천만표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런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대하를 이루고, 성난 물줄기는 기존의 둑을 허물어 새 나라로 향하는 물길을 만들 것이다.
그런 희망마저 없다면 투표장으로 가는 발걸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비가 오지 않는 땅  (1) 2004.05.03
길 떠난 사람들  (4) 2004.04.23
산다는게 뭔지  (3) 2004.04.01
살다 보면  (2) 2004.03.21
바쁘고 힘들다  (0) 200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