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겨울 산길을 걷다

샌. 2004. 1. 17. 14:21

어제는 직장 동료들과 예봉산(禮峰山)을 올랐다.

예봉산은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683m이다. 옛날에는 겨울 한양의 땔감을 대부분 이 산에서 벌채해 한강을 따라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큰 나무는 별로 없고, 다만 군데 군데 눈에 뜨이는 노거목들이 그 때의 정황을 전해주고 있다.

산의 이름이나 생김새는 다르지만 산에 들면 그런 구별은 사라지고 어느 산에서나 공통된 마음의 넉넉함과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산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런 마음의 여유일 것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이해하기 못하는 산의 정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산 기운이 우리 마음을 순화시키고 세상의 욕망을 잠재워 준다고 말이다.

바닥에서 아웅다웅 다투며 속 끓이고 하던 것들이 산길을 걸으면 기이하게도 봄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목숨 걸고 덤비던 내 행동이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성찰할 눈이 뜨이기도 한다.
마음을 덮고 있던 티끌이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간다.

나는 이것을 정신의 목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산이 주는 제일의 선물이다.

다른 사람들은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건만, 나는 어쩌다 운동화에 보통의 외출복 차림으로 오르게 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눈이 오지 않아서 그늘진 일부에만 조심하면 되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산이라 무척 힘들었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걸음에 자꾸 뒤로 쳐졌다. 때문에 운길산까지 가려던 산행이 짧은 코스로 조정되어야 했다.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나는 완만한 능선길이 좋다.
8부 능선쯤 되는 산길, 적당한 오르내림이 있는 옆으로 뻗은 길을 좋아한다.
어느 산이나 그런 길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길에서 몸과 마음은 더욱 안식을 얻는다.

마음은 복잡한 일상에서 해방되고, 그저 지팡이 하나 들고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며 가난한 방랑자가 되고 싶기도 하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몇 단계로 나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나이가 50이 넘으면 임서기(林棲期)라고 하여 생활인으로서의 구속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현대의 세상살이에서야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산길을 걸을 때는 왠지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 것만 같기도 하다.

드디어 정상에 서니 멀리 산들의 윤곽이 희미하게 겹쳐져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물결치는 것처럼 부드럽다.
눈 아래로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곡류를 이르며 산을 에워싸고 흘러가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봉우리는 철문봉(喆文峰)이라고 한다.
정약용 형제들이 능내리 여유당에서 출발해 이 산에 올라 학문을 닦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 여기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청운의 뜻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0여 년 뒤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타나고 하면서 여기를 거쳐갈 것이다.

산을 내려와서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한강을 따라 팔당에서 덕소까지 1시간여를 걸었다.
이미 어두워진 밤길이었다. 다리는 아팠지만 마음은 온 세상을 담을 듯 넓어졌다.
감자탕으로 소주를 나누고 헤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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