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방(禪房) 승(僧)의 아무 고저장단 없는 먼, 마른 목소리의 첫째 이야기를 듣는다
말도 없이 출가해 수년 후 정식 비구계를 받고 고향집 양친을 찾아 갔노라고
50줄 아버지가 오늘 나랑 함께 자자며 이부자리를 펴시는데
중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안 잡니다 쌀쌀맞게 내뱉고는 다른 방에서 잤노라고
한 선방 승의 찬 하늘 구만리를 가는 기러기라도 배웅하는 듯, 젖힌 고개의 둘째 이야기를 듣는다
누나가 미국으로 이민간다고, 공항에서라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전갈온 적 있었노라고
절방 마루 끝에 서서 비행기 출발했겠구나 산문 밖이나 건너다 보았노라고
누나 아이가 둘이라는데 그 조카들 얼굴도 모르고
한 선방 승의 고저장단 없는 먼, 마른 목소리의, 이번에는 아주 작은 웃음기가 입가에 짧게 머문 셋째 이야기를 듣는다
이번 해제 때 고향집 늙은 양친을 보러갔노라고
대문에 들어섰는데 아버지가 떡 쳐다보시더니 누구슈, 그러더라고
이십오륙년 만이가.... 사라지는 아주 작은 웃음기
내 귀는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는가
절(絶), 절(絶), 절(絶), 끊는, 끓는 얼음의 고요
핏줄이 터지는 별세계 너무 매운 이야기를
- 내 귀는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는가 / 이진명
스님이 된 친구가 있다. 고향집 옆에 살며 함께 자랐던 동갑 동무다. 어느 날 스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묘한 인연으로 군대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있던 부대에 군종 사병으로 그가 온 것이다. 사무실 바로 옆에 법당이 있었으니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쉬기도 하며 친구 덕을 자주 봤다. 그런데 제대를 하고 나서는 다시 소식이 끊어졌다.
얼마 전에 어머니 편으로 친구 얘기를 들었다. 병에 걸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던 모친이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려고 법주사로 친구를 찾아갔더란다. 그러나 만날 수 없다는 전갈을 받고 모친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고 한다. 며칠 뒤 모친은 이승을 뜨셨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어머니를 혀를 차셨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맵다. 그러나 친구의 맘 속에 들어 있는 차가운 섬 하나, 그 얼음의 고요에 난 다가가지 못한다. 따라서 판단할 수 없다. 세상에 매운 이야기가 어디 한둘이랴. 마음이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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