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 허만하

샌. 2016. 11. 15. 11:59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 허만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이 되어야 날개를 편다." 이 시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문득 헤겔의 이 말이 떠올랐다. 높고 밝은 세계는 정신의 빈곤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도시의 달동네, 꼬챙이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의 힘을 생각한다. 그늘 속 민중의 힘일 수 있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새벽빛은 어두운 곳을 먼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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