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성지(24) - 해미순교성지

샌. 2020. 6. 3. 10:35

37. 해미순교성지

대전교구에 속한 해미순교성지는 1797년(정사박해)부터 1872년까지 대략 1천 명 이상이 순교한 곳이다. 그중에서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이며,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호 비우 세 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2014년에 시복 되었다.

순교자 중 대부분이 무명인 이유는 당시 해미현은 무관영장이 지역 통치를 하면서 권력을 남용하여 자유로이 박해를 하면서도 중앙에 보고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명 순교자의 묘.

잡아온 천주교인을 죽이는 방법은 다양했다. 사약, 몰매, 참수, 생매장과 함께 물에 빠트려 처형하는 수장형이 있었다. '진둠벙(죄인둠벙)'이라 불리는 웅덩이가 남아 있다. 팔을 묶은 신자를 거꾸로 떨어뜨려서 이 둠벙 속에 쳐박혀 죽게 한 곳이다.

해미읍성 서문 밖에 있던 돌다리로 병인박해 때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 도구로 쓰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여숫골'이라 부른다. 순교자들이 죽음의 행렬 중에 바쳤던 '예수마리아' 기도 소리가 외인들에게는 그렇게 들렸다고 한다.

순교성지기념관 안에는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순례자들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기 위해 성경 이어쓰기를 하는 작은 초가집이다.

소성당 내부.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곳을 방문하셨다. 성지 뜰에 있는 교황님 옆에 서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면 기존 체제와 갈등을 겪는 건 당연하다. 전통적 이념이나 국가 권력은 기득권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박해를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의 역사를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자가 희생되었다. 어쩔 수 없이 배교한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신앙을 포기한 사람은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 겉으로는 배교했을 망정 속으로는 신앙의 양심을 지킨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천주교 성지에 오면 신앙의 아웃사이더였던 사람들의 삶도 동시에 떠오른다. 그런 이들에 대한 조명이 부족함을 느낀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 모두를 아우르는 관점이 필요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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