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샌. 2020. 12. 22. 09:53

김훈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문명과 야만의 충돌과 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에 대해 썼다고 말했다. 소설의 무대는 대륙의 넓은 땅인데 동서로 흐르는 나하(奈河)를 경계로 북쪽의 초(草)와 남쪽의 단(旦) 두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초는 유목민족이고 단은 농경민족인데, 초가 단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두 나라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작가가 지어낸 것이다. 역사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도 역사 기록 이전의 아득한 옛날이다. 사람과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말이다. 야백(夜白)과 토하(吐霞)라는 두 말인데 전쟁터를 누비며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만 결국에는 야생 상태의 말의 길을 찾아간다. 야백이 스스로 이빨을 빼서 재갈을 벗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작가의 짧고 건조한 문체는 역시 대규모 전쟁의 비장함과 잘 어울린다. 비극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섬뜩하다. 초나라의 돈몰 풍습도 흥미롭다. 돈몰(旽沒)은 '밝은 죽음'이란 뜻으로 초나라 노인은 공동체에 부담이 되는 나이가 되면 스스로 나하에 빠져 죽는다. 왕도 예외가 아니다. 작가가 그려내는 돈몰 장면도 차갑도록 애잔하긴 마찬가지다.

 

동쪽 변방의 백산(白山) 밑에는 월(月)나라가 있다. 초와 단에 비해 미미한 나라라 소홀하게 보아넘기기 쉬운데 나에게는 이상국가로 보였다.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연상되는 평화의 나라다. 작가의 묘사는 이렇다.

 

월나라라고들 하지만 월은 임금이 없고, 군대가 없고, 벼슬아치들이 세(稅)를 걷어가지 않았으니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월은 예닐곱 갈래의 부족들로 흩어져서 이웃하고 있었다. 부족마다 읍차(邑次)라고 하는 족장이 어른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읍차의 지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읍차는 홍수나 가뭄에 대처했고 마을의 풍속과 놀이를 관리했으나 사람들이 먹고살고 교접하는 일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줄기를 끌어 땅을 적셔서 밭곡식을 길렀는데, 낱알의 반은 새들이 먹었다. 소출이 많지는 않았으나 땅이 외져서 지방관이나 위수군들의 토색이 미치지 못했고 갈나무숲이 너그러워서 떠돌아다니지 않고 머물러 살았다.

눈이 쌓여서 길이 묻히면 동서남북을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면 하얀 설원 위로 집집마다 푸른 연기가 올랐다.

 

야배과 토하는 마지막에 월에 와서 생을 마감한다. 정치에 뜻이 없던 초의 왕자 연(然)도 벌레와 짐승과 더불어 방랑하다가 월을 거쳐 백산에 들어간다. 월은 평화를 사랑하는 생명이 깃들 보금자리였다. 이런 월도 초의 침략을 받고 주민들은 동쪽으로 쫓겨간다. 소설의 마지막은 월의 주민이 터를 떠나는 장면이다.

 

백성들의 대열은 벌판에서 긴 띠를 이루었다. 저녁에는 초원에 초승달이 뜨고 졸린 아이들이 칭얼거렸다. 대열이 지나간 자리에 풀들이 누워서 희미한 길의 자취가 드러났고, 바람에 지워졌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리 지어 사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초와 단의 싸움은 형태만 달리할 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월의 이상은 버티지 못한다. 그나마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의 힘을 보여준 야백의 기상에서 위안을 찾을까.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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