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소설이다. 작가는 1954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학업을 마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낸다고 한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집사로 일하는 스티븐스가 과거에 함께 일했던 켄턴을 찾아가는 6일 동안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스티븐스로서는 달링턴 홀을 떠나 평생 처음 해 보는 여행이다. 중간중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여정과 교차하며 소설을 구성한다.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품격'이다. 품격과 충성심, 성실, 명예 등을 빼놓고는 스티븐스를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븐스는 귀족을 섬기는 자신의 직무에 철두철미 봉사한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 나오는 왕실 집사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개인의 삶이나 주장은 없고 최우선 순위가 주인에 대한 절대복종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대저택에 갇힌 노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한 축을 맡았다고 자신한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다. 스티븐스가 모시는 달링턴은 독일에 우호적인 인사였다. 전후에 달링턴은 재판에 넘겨지고 스티븐스도 그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실하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삶이 변호되지는 않는다.
일류 집사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보면 집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와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연회를 준비할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생겨서는 안 되니 성격도 극치밀해야 한다. 하녀장인 켄턴은 스티븐스를 사랑했다.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스티븐스도 켄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직무에 방해되는 어떤 것도, 사랑의 감정마저도 용납할 수 없었다. 스티븐스는 켄턴을 얼음보다 더 차갑게 대하고, 실망한 켄턴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달링턴 홀을 떠난다.
황혼이 되어 스티븐스는 켄턴을 찾아간다. 명분은 다시 달링턴 홀에 돌아올 수 없느냐는 부탁을 하려는 것이지만, 옛사랑을 만나보고 싶은 의도가 더 컸을 것이다. 켄턴의 선택은 현실의 삶을 긍정하며 땅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었다. 비하여 스트븐스는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껍데기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스티븐스도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다. 순수한 인간의 감정까지 숨기고 거부하며 일에 충실했던 삶이 과연 올바르게 산 걸까? 스티븐스는 켄튼과의 마지막 이별 장면에서조차 평소의 품위를 지킨다. 이때는 의례적인 인사말이 너무 하찮고 쓸쓸하게 들린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홀에 돌아와 새 미국인 주인인 패러데이를 모실 준비를 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농담이나 유머의 기술을 익히려고 애쓴다. 책을 읽으며 안스럽게 느낀 것은 스티븐스나 켄턴이나 마찬가지다(둘은 결이 다른 안타까움이긴 하다). 또한 우리 누구도 스티븐스나 켄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소설 말미에 한 노인이 스티븐스에게 충고한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스티븐스의 남아 있는 날들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색깔로 채색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스티븐스는 끝까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의 심사를 걱정하고 있다.
"내 주인께서 돌아오실 즈음에는 그분이 흐뭇하게 감탄하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