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사랑인 줄 알았는데

샌. 2024. 4. 8. 08:04

일본은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버타운협회에서 주관하는 센류 공모전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센류(川柳)'란 5-7-5 음률의 정형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다. 하이쿠와 비슷한데 자연을 소재로 하는 하이쿠와 달리 센류는 인간 삶의 애환에 중점을 둔다. 이 공모전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매해 1만 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된다고 한다.

 

고령자의 생활상과 심정을 읊은 '실버 센류' 작품을 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프고 애잔하다.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상작은 책으로도 출판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다. 그중 몇 수를 골라보았다.

 

확인한다

옛날에는 애정

지금은 숨소리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자명종

울리려면 멀었다

일어나서 기다린다

 

개찰구 안 열려

확인하니

진찰권

 

세 시간을

기다렸다 들은 병명은

"노환입니다."

 

연명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물 온도 괜찮냐고

자꾸 묻지 마라

나는 무사하다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

 

영정사진

너무 웃었다고

퇴짜 맞았다

 

심각한 건

정보 유출보다

오줌 유출

 

안약을 넣는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다

 

경치보다

화장실이 신경쓰이는

관광지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이 나이쯤 되니

재채기 한 번에도

목숨을 건다

 

젊게 입은 옷

자리를 양보받아

허사임을 안다

 

눈에는 모기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산다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고 나니

눈앞이 캄캄

 

오랜만에 보는 얼굴

고인이 연 이어주는

장례식장

 

스쿼트를 하다가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자기소개

취미와 지병을

하나씩 말한다

 

희수(喜壽, 77세)지만

은사 앞에서는

아직 여고생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70 고개를 넘으면 몸은 이곳저곳 탈이 나도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 나도 최근에 비뇨기에 이상이 왔다. 갑자기 요의를 느끼면 참지를 못하고 지릴 때가 있다. 물소리에 예민해져서 설거지를 하다가는 화장실로 달려간다. 기저귀를 다시 차야 할지 모르겠다. 돌고도는 세상사다. 며칠 전 동기들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나도" "나도" 하면서 한 마디씩 보탰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나이가 되면 다들 무언가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이걸 소재로 나도 센류를 지어볼까 하고 이런저런 단어들을 골라보고 있는 중이다. 근간에 작품 하나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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