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사기[17-1]

샌. 2024. 4. 26. 09:54

공자(신릉군)는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예의로 대우했다. 선비가 어질든 그렇지 않든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사귀고, 자기가 부귀하다고 해서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그의 어짊에 선비들이 수천 리에서 앞을 다투어 몰려와 공자에게 몸을 의지하여 식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그 무렵 제후들은 공자가 어질고 식객이 많음을 알고 섣불리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지 않은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 사기(史記) 17-1,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4 공자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이다. 신릉군은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이름은 무기(無忌)였다. 사마천은 신릉군이 어질고 겸손하며 선비들을 존경하면서 사사로운 이익보다 나랏일을 중시한 것을 높게 평가한다. 위나라 왕은 신릉군에게 많은 사람이 따르면서 능력 있음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신릉군이 얼마나 숨어 있는 선비를 찾고 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집이 가난해서 나이가 일흔임에도 대량성의 문지기를 하는 후영이라는 현자가 있었다. 신릉군은 직접 후영을 찾아가서 청하여 수레에 모셨는데, 후영은 신릉군을 떠보고자 시장의 푸줏간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일부러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끌었는데 신릉군은 말고삐를 잡은 채 온화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신분의 차이를 생각하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릉군은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으며,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예로 대했다. 이런 선비들의 도움으로 신릉군은 조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무찌르는 그의 대표적인 공적을 세울 수 있었다.

 

신릉군에 의해 발탁된 후영은 뒷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신릉군을 충심으로 모셨다. 어떻게 해야 빈객들로부터 충성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 신릉군은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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