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사기[18]

샌. 2024. 5. 23. 07:25

"초나라 왕께서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 친형제보다 더합니다. 이제 당신은 20년이 넘게 초나라 재상으로 계셨고 왕께는 아들이 없습니다. 만일 뒤에 왕이 돌아가시고 왕의 형제가 왕위에 오르면 초나라는 임금이 바뀌고, 새 군주는 예전부터 친밀했던 사람들과 친척들을 소중히 여길 것이니, 당신이 어찌 오래도록 총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정권을 잡은 지 오래니 왕의 형제들에게 예의에 벗어난 행동도 많이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형제가 왕위에 오르면 재앙이 당신 몸에 미치게 될 텐데 어떻게 재상의 인수와 강동이 봉읍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소첩만 임신할 것을 알 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소첩이 당신의 총애를 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당신의 존귀한 지위를 이용하여 저를 초왕에게 바친다면 왕께서는 반드시 소첩을 총애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와 소첩이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당신 아들이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초나라가 전부 당신 것이 됩니다. 당신이 뜻하지 않은 재앙을 당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좋습니까?"

 

- 사기(史記) 18,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전국시대 네 공자 중 마지막으로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이 소개된다. 춘신군은 이름이 황헐(黃歇)이다. 그는 전국시대 말기에 뛰어난 외교술로 기울어가는 초나라를 진나라의 공세에서 막아내면서 25년간 초나라의 재상으로 지냈다. 그러나 마지막은 비참했다. 춘신군도 다른 공자들과 마찬가지로 빈객을 우대하며 조언을 들었으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파탄을 맞은 것이다.

 

춘신군의 빈객 중에 이원(李園)이 있었다. 출세욕이 강한 그는 자기 누이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치고 아첨을 하며 섬겼다. 이원은 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모사를 꾸몄다. 마침 초나라 고열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다. 이원은 동생이 임신한 것을 속이고 고열왕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는다면 자신이 권세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위의 말은 이원의 동생이 춘신군에게 자신을 왕의 후궁으로 들여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판단력이 흐려진 춘신군은 이 말을 옳다고 여기고 이원의 누이동생을 왕에게 천거했다. 궁궐에 들어간 뒤 사내아이를 낳자 자신의 아들인 줄 믿은 왕은 태자로 삼았고, 그녀는 왕후가 되었다. 누이동생이 왕후가 되었으니 이원은 소원대로 정사를 주무르게 되었고, 춘신군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고열왕이 중병에 걸리고 태자가 왕이 될 때가 다가왔다. 이원은 비밀을 알고 있는 춘신군이 두려워 죽이려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이때 다른 빈객인 주영(朱英)이 경고했지만 춘신군은 듣지 않았다. "그대는 그만 두시오. 이원은 나약한 사람이며, 나는 또 그를 잘 대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소?" 춘신군은 마지막 기회조차 걷어차 버렸다. 간이라도 빼줄 듯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고열왕이 죽자 입궐하는 춘신군을 이원은 군사들을 매복시켜 목을 베어 죽인 뒤 집안사람까지 몰살시켰으니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난 셈이었다. 얼마 뒤 진시황에 의해 초나라는 멸망했다.

 

젊었을 때 뛰어난 변설로 초나라를 지켜낸 춘신군의 공로는 혁혁했다. 하지만 오래 재상을 지내며 권력의 단맛에 취한 탓일까, 간신의 말에 속은 최후는 비참했다. 사마천은 춘신군이 이원에게 당한 일을 늙어서 사리판단이 어두워진 탓이라고 평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이 있다[良藥苦口]. 언제 어디서나 사탕발림의 말은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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