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사기[15-1]

샌. 2024. 3. 15. 10:46

"내 너에게 이 아이를 버리라고 했는데 감히 키운 것은 무엇 때문이냐?"

문(文)이 머리를 조아리며 어머니 대신 말했다.

"아버님께서 5월에 태어난 아들을 키우지 못하게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전영이 대답했다.

"5월에 태어난 아들은 키가 지게문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에게 해롭다고 하기 때문이다."

문이 또 물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운명을 하늘로부터 받습니까? 아니면 지게문으로부터 받습니까?"

전영이 대답하지 않자 문이 다시 말했다.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전영이 말했다.

"너는 그만하여라."

 

- 사기(史記) 15-1,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맹상군(孟嘗君)이 얼마나 총명했느냐를 보여주는 어릴 적 일화다. 아버지 몰래 자란 맹상군은 나중에 어머니가 힐난을 받을 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맞서 아버지가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지게문을 높이면 그만이라는 말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연상케 한다. 맹상군의 이름은 전문(田文)이고 아버지는 제나라 재상을 지낸 전영(展嬰)이다. 맹상군은 전영의 첩에서 난 아들로 전영에게는 아들만 40여 명이 있었지만 타고난 영특함으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 제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제나라 맹상군, 조나라 평원군, 위나라 선릉군, 초나라 춘신군을 전국시대의 사공자(四公子)라 부른다. 이들은 각각 식객을 3천 명씩이나 거느리며 선비를 양성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들이다.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면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맹상군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차별 없이 대우했다. 빈객 중에는 좀도둑이나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내던 사람이 있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 잡혀 있다가 탈출할 때였다. 국경인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밤이어서 성문이 잠겨 있었다. 국경의 법으로는 첫닭이 울어야 객들을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뒤에서는 진나라 군대가 맹상군을 잡으러 오고 있는데 한시가 급했다. 그런데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수행원이 "꼬끼요"라고 하자 근처의 닭들이 다 울었다. 성문이 열렸고 맹상군 일행은 진나라를 빠져나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맹상군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나라 재상을 지냈고 설 땅을 봉읍으로 받아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수많은 식객을 거느렸다. 능력이 있으면서 부와 권력을 동시에 잡았지만 인물됨됨이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는 냉소적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도망쳐 조나라를 지날 때였다. 맹상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들었던 조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나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맹상군은 키가 훤칠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왜소한 사내로구나."

맹상군이 이 말을 듣고 노여워하자 그를 따르던 자들이 조나라 사람 수백 명을 베어죽이고 아예 현 하나를 없애 버렸다고 한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맹상군의 잔인한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맹상군은 외모에 대해서 엄청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맹상군은 말년에 자신의 봉토인 설 땅에서 살다 죽었다. 여러 아들이 재산과 자리를 가지고 싸우는 동안 이웃 나라가 쳐들어와 멸망시켰다. '맹상군은 후사가 없어져서 대가 끊겼다'라고 사마천은 담담하게 기술한다. 한 시대를 좌지우지한 맹상군이었지만 그 영화는 한 순간에 사라진 물거품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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