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경(荀卿)은 조나라 사람인데 쉰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나라에 건너와 학문을 닦았다.
제나라 양왕 때에는 순경이 가장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열대부 자리가 모자라면 그때마다 채워 넣었는데 순경은 세 차례나 좨주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 중에서 어떤 이가 순경을 참소하자 그는 초나라로 떠났다. 초나라의 춘신군은 그를 난릉의 현령으로 임명했다. 춘신군이 죽자 순경도 관직에서 쫓겨났지만 이 일로 집안 대대로 난릉에서 살았다.
이사(李斯)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훗날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순경의 시대에는 세상의 정치가 혼탁했으며 멸망하는 나라와 난폭한 군주가 잇달아 나오고, 성인의 기본적인 도리를 닦아 몸으로 실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속에 빠져 길흉화복의 징조를 믿고 못난 유학자들이 하찮은 일에 얽매이며 장주(莊周) 같은 이들이 우스갯소리 주장으로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했다. 그래서 순경은 유가, 묵가, 도가의 학설이 펼쳐진 결과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을 살펴 차례로 정리해서 수만 자의 책을 남기고 죽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난릉에 묻혔다.
- 사기(史記) 14-2,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맹자=성선설, 순자=성악설' 할 때의 순자를 순경(荀卿)이라고도 부른다. 원래 이름은 순황(荀況)인데 순경이나 순자는 경칭으로 쓰이는 말이다. <사기>에는 순경의 일생에 대해 이렇듯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맹자순경열전'에는 맹자와 순경 외에 그 시대의 다양한 학설과 인물들이 나온다. 제목처럼 맹자와 순경에 특별한 비중을 두지도 않았다.
전국시대 말기를 산 순경은 같은 유가에 속하지만 맹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순경은 이기적이며 악하다고 보았다. 왕도에 의한 덕치를 주장한 맹자에 비해 순경은 패도 정치도 어느 정도 용인했다. 맹자에 비해서는 훨씬 현실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순경의 제자인 이사나 한비자가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순경은 인간 본성이 악하지만 교육을 통해 교정할 수 있다고 보고, 예(禮)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계층 간의 불화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순경이 도가 학파를 비판하면서 '장주 같은 이들이 우스갯소리 주장으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주장이 눈에 띈다. 만약 장자가 들었다면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랴!"라고 대꾸했을지 모른다.
순경은 인간의 본성이 악한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성악편>에 나오는 말이다.
"무릇 사람이 선(善)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惡)하기 때문이다. 대저 천박하면 중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협소하면 광대하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미천하면 고귀하기를 원하니, 진실로 그 안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