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너의 목소리가 들려

샌. 2024. 6. 17. 10:15

지금은 뜸해졌지만 한때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벌이는 대폭주는 규모가 엄청났고 시민들에게 주는 피해도 컸다. 저게 무슨 짓거리냐,가 대부분의 반응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경찰력으로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걸 원망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들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폭주를 감행하는 십대들의 분노와 절망을 그들의 시선에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가출 청소년의 어두운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이런 삶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어두운 뒷골목이나 지하의 사연을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제이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처지의 아이들과 지내다가 그들의 정신적 우두머리가 된다. 제이는 타인이나 다른 생명의 고통에 예민해서 영적 지도자와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그가 보육원 원장과 나누는 대화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이 소설의 주제가 들어 있는 대화가 아닌가 싶다. 타자의 고통이나 비극에 무관심한 것이 현대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가진 것 없고 볼품없는 이들에게 깊은 연민과 공감을 보여주며 우리들의 양심을 찌른다. 나의 웃음이 타인의 눈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아프게 되돌아본다.

 

작가는 제이가 동규에게 하는 말을 빌려 폭주족의 분노를 대변한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폭주를 한다고? 그건 스트레스가 아니야. 가게 주인에게 쟁반으로 머리통을 맞았을 때 느끼는 게 스트레스야? 장난으로 엉뚱한 집에 배달시키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킬킬거리는 애새끼들을 볼 때 느끼는 게 스트레스야? 껀수 잡으려고 만만한 우리 잡아서 반말 찍찍하면서 딱지 떼는 짭새 만나면 스트레스야? 아니야. 스트레스는 내일 시험이 있는데 공부가 충분하지 않을 때,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길이 꽉 막혀 있을 때, 그런 때나 느끼는 거야. 그럼 우리가 느끼는 건 뭐야? 분노야. 씨발, 존나 꼭지가 돈다는 거야. 그래, 우리는 열받아서 폭주하는 거야. 뭐에 대해서? 이 좆같은 세상 전체에 대해서. 폭주의 폭 자가 뭐야? 폭력의 폭 자야. 얌전하면 폭주가 아니라는 거지. 엄청난 소리를 내고, 입간판을 부수고, 교통을 마비시킬 때, 그제야 세상이 우리를 보게 되는 거야.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거야.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 말로 하면 안 되냐고? 안 돼. 왜? 우리는 말을 못하니까.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는 거니까 자꾸 우리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거야."

"난 이해받고 싶은 게 아니야. 열받게 하려는 거지. 세상은 우리를 미워해. 왜냐하면 우리가 존나 부럽거든. 우리가 배달이나 다니고 검정고시 공부나 하면서 찌그러져 있어야 마음이 편한데, 신호도 차선도 무시하고 꼴리는 대로 달리잖아. 밤늦도록 집에도 안 들어가고. 꼰대들이 그렇게 침 흘리는 어린 여자애들 뒤에 태우고 다니고. 그러니 죽이고 싶은 거지. 걔들이 우리를 이해 못하는 것 같아? 아니야. 이해 잘해. 그래서 미워하는 거야."

 

광복절 밤에 제이가 1천 명의 분노한 폭주족을 이끌고 서울 한복판을 질주하는 장면이 소설의 끝이다. 이는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힘없는 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이젠 '너의 목소리'가 조금은 들리는 듯도 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제이에게 주목한다. 생쌀을 씹으며 쓰레기더미에서 구한 책으로 지혜를 얻고 만물에 빙의해 고통을 나누는 능력을 지닌 제이는 매우 비범한 인물이다. 때를 잘 만났다면 체 게바라나 말콤 액스 같은 혁명가가 되었을 자질이 충분한 아이다. 작가가 폭주족의 우두머리로 이런 내면이 뛰어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제이는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닌 오로지 밑바닥 삶을 통해 인생의 철리를 깨달았다. 제이의 또 다른 말이다.

 

"마음의 눈을 열고 주변을 깊이 살펴. 사람들이 하는 뻔한 말을 믿지 마. 그래야 너 자신을 구할 수 있어. 넌 소중하니까."

 

"뛰지 마.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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