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알아야 면장을 하지

샌. 2010. 6. 14. 12:11

“알아야 면장을 하지.” 어렸을 때는 아버님이 면장을 하신 관계로 유독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는 일부러 더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겸연쩍긴 하지만 같이 웃곤 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면장’을 면(面)이라는 행정 단위의 기관장을 뜻하는 면장(面長)으로 알고 있었다. 그 말을 썼던 사람들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골의 면장(面長)이라도 하려면 뭔가 아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아도 ‘알아야 면장을 하지’는 속담으로 올라 있는데,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려면 그것에 관련된 학식이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그런데 면장의 어원은 원래 다른 뜻이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면장은 면장(面長)이 아니라 담을 벗어난다는 뜻의 ‘면장(免牆)’이라는 것이다. 이 고색창연한 ‘담장 장(牆)’자는 지금도 학교 현장에서 쓰인다. 담을 타고 넘는다는 것을 ‘월장(越牆)’이라고 하는데, 월장하는 아이를 단속하라는 등의 지시가 아직도 내려온다. 어색한 한자 용어가 끈질기게 사용되는 걸 보니 습관의 힘은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 ‘면장(免牆)’의 출처는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나온다고 한다.


子謂伯漁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공자께서 백어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시경의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였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담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공자가 대청에서 쉬고 있는데 아들인 백어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공자가 물었다. “너는 시경을 공부하였느냐?” 백어가 머리를 긁적이며 안 배웠다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혀를 끌끌 차며 “이놈아, 사람으로서 시경을 배우지 않으면 담을 맞대고 서있는 것과 같으니라. 쯧쯧.” 아마 이랬을 것이다. 아들을 안타까이 여기는 아버지로서의 공자의 마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담을 마주한다는 뜻의 장면(牆面), 또는 면장(面牆)은 공부를 하지 못해 아는 것이 없는 답답한 상태를 나타낸다. 학문의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경을 공부해서 지식의 시야를 넓힌다는 의미의 담을 벗어난다는 것이 면면장(免面牆)이고, 이것이 줄어 면장(免牆)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은 “알아야 나를 가로막은 담에서 벗어나지.” 또는 “알아야 답답함을 면하지.”가 본래 뜻인 셈이다.


바른 비유인지 모르지만 길거리에서 외국인이 영어로 길을 물어볼 때 느끼는 답답함이 바로 면장(面牆)이 아닐까. 그러나 영어 회화가 능숙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일찍 면면장(免面牆)을 한 것이다. 따라서 면장(免牆)을 하기 위해서는 진즉에 영어 공부를 해 놓았어야 했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이 면장이나 저 면장이나 의미 차이가 크지는 않으니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알고 나니 ‘면장’의 원래 의미가 훨씬 더 멋있게 느껴진다. 공부란 담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학문을 한다는 것, 공부는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 의미가 변색되어 공부가 출세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大學)에서 학생들이 하는 공부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은 실용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된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슬픈 현실이 바로 두 단어, 면장(免牆)과 면장(面長)의 차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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