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길렀다.
열흘이 지나자 왕이 물었다. "닭은 다 준비되었나?"
기성자가 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지금은 교만하여 기운을 믿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자 또 왕이 물었다.
기성자가 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울음소리와 그림자만 보면 달려듭니다."
열흘이 지나자 또 왕이 물었다.
기성자가 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질시하고 기운이 왕성합니다."
열흘이 지나자 또다시 왕이 물었다.
기성자가 답했다. "거의 된 것 같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아무 변화가 없고,
나무로 만든 닭처럼 보입니다. 덕이 온전해졌습니다.
다른 닭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도리어 도망쳐 버립니다."
紀성子爲 王養鬪鷄
十日而問 鷄已乎
曰 未也
方虛驕而恃氣
十日又問
曰 未也
猶應嚮景
十日又問
曰 未也
猶疾視而盛氣
十日又問
曰 幾矣
鷄雖有鳴者 已无變矣
望之似木鷄矣 其德全矣
異鷄無敢應者 反走矣
- 達生 5
별명이 싸움닭인 동료가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늘 시비가 잦았다. 좋게 말하면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자기 주관이 강한 대신 남의 다른 생각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와 충돌을 피하고자 아예 입을 닫았다. 장자의 이야기에 견주면 그는 교만하고 자신의 기운만 믿는 하급의 싸움닭인 셈이었다.
나는 장자의 이 싸움닭 이야기에서 부쟁(不爭)의 원리를 읽는다. 고수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다. 그는 고요하고 초연하다. 나무로 만든 닭과 같지만 다른 닭들은 덤벼볼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 버린다. 이런 것이 나무닭의 덕[木鷄之德]이다. 나무닭의 고요함은 어떤 도전에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초보 싸움닭은 자신의 기운만 믿고 날뛴다. 그 기운이 왕성하다는 것은 자아로 충만된 상태다. 그러난 삶의 달인은 자아를 버림으로서 자아를 완성한다. 그것이 태산 같은 진중함이고 조용한 카리스마다.
어찌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초보 싸움닭에서 나무닭으로 변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온 세상이 내 것이었다. 호연지기니 청운의 꿈이니 하며 세상을 내 손 안에서 갖고 놀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풍선에 바람 빠지듯 자아에 대한 신뢰나 자신감은 없어진다. 운명을 긍정할 수 있게 되고 마음 속에는 빈 자리가 늘어간다. 무시로 변하는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도 않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유치한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도 많다.
나무닭의 평상심을 닮고 싶다. 특히 외물에 쉽게 반응하는 내 밴댕이 기질은 지금도 여전해서 부끄럽다. 어떤 자극에도 조금은 무심해지길 바란다. 얻고 잃는데 너무 예민하지 않기를 바란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