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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하여 / 안도현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집을 갖는다는 것은 저 제비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볏짚 한 오라기 엮어 얹지 않고 진흙 한 톨 물어다 바르지 않고 너나 없이 창문 큰 집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그만큼 훔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인가 허구한 날 공중에 떠서 살아가다 보면 내 손으로 땅 위에 집을 한 채 초가삼간이라도 지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혹시 바람에 찢기도 무너진다 해도 훗날 내 자식새끼들이 자라면 꽁지깃을 펴고 실패하지 않는 집을 다시 지을 테니까 - 집에 대하여 / 안도현 남은 내 꿈의 중의 하나는 내손으로직접 내 집을 지어 보는 것이다. 언젠가 넥타이를 벗어 던지게 되는 날이 오면 그 꿈은 현실로 다가올 것으로 믿고 있다. 흙을 올리고, 나무를 세우며, 1년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작은 집 한..

시읽는기쁨 2005.06.10

그리움

무엇이 그리운지 풀은 갈 수 없는 땅 위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기는 인간의 땅이야, 너희들은 오지 마. 너와 나의 경계를 가르는 백색의 선 - 그 너머도 예전에는 풀들의 고향이었다. 변방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처럼 나중에는 풀들도 쫓겨나 야생풀 보호구역에서나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리움에 몸을 흔들며 자꾸만 키가 크고픈 고요한 한낮.

사진속일상 2005.06.09

열대수련

터에 가는 길에 세미원(洗美苑)이 있어 가끔씩 들린다. 세미원은 온실 안과 바깥 연못에 여러 종류의 연꽃을 기르고 있는데, 세미원이라는 이름은 '觀水洗心 觀花美心'(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이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번에는 어리연꽃이 피었을까 기대를 했지만 수련 몇 송이만 피어 있어서 썰렁했다. 대신 산책로를 따라 붓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수련과에 속하는 연꽃과 수련은 물에 대한 꽃의 위치로 구분한다. 연꽃은 꽃이 크고 물 위로 높게 올라와서 꽃이 핀다. 반면에 수련은 꽃이 작으며 대개 수면에 붙어있다. 세미원의 온실 안에는 기온 탓인지 주로 열대수련을 기르고있다. 아무래도 색깔이 진해 연꽃의 분위기가 잘 전해오지 않는다. 마치 서양난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

꽃들의향기 2005.06.08

무지한 사람들

‘최근 송진이 몸에 좋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남산 소나무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이 무분별하게 소나무 껍질을 도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남산을 오른다는 한 시민은 “얼마 전 한 부부가 칼로 소나무 껍질을 벗겨내고 있길래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송진향을 맡으면 건강에 좋다’고 대답해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기조차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이기성과 잔인하고 천박한 속성이 무섭습니다. 그놈의 어두운 기운은 분명 전 생명체를 파괴시키고 말 것 같습니다. 터에 내려가면 가끔씩 뒷산에 오릅니다. 외딴 시골에 ..

참살이의꿈 2005.06.07

수도자에게 보낸 편지

‘수도자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소로우의 향기를 다시 맡는다. 소로우의 글은 탁한 세상에서 머리를 맑게 해주는 청량한 솔바람이다. 삶에 지치고 답답할 때 그의 글을 읽으면 새로운 생기가 돋는다. 그의 글은 살아있다. 내용을 떠나 아름다운 영혼의 옆에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행복하다. 1847년 소로우의 나이 30세 때 그는 월든 호수에서의 오두막 실험 생활을 마치고 콩코드로 돌아온다. 그 1년 뒤부터 블레이크라는 친구와 13 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소로우가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 이 책이다. 블레이크가 세속적인 삶에 환멸을 느끼고 영적으로 굶주려 있을 때 더 진실하고 더 순수한 삶의 방법을 묻는 편지를 소로우에게 부치면서 두 사람의 편지는 시작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진리를..

읽고본느낌 2005.06.04

바위취

바위취는 그늘에서 잘 자라는데번식력이 아주 좋다. 꽃잎 모양이 특이한데 위에 달린 석 장은 크기가 작고, 아래에 있는 두 장은 길게 뻗어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모양이 한자의 큰 대[大]자를 닮았다. 그래서 '대문자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위취를 보고 큰 대자를 모른다'는 속담도 생겨날 법 하다. 또 잎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듯한 '범의귀'라는 이름도 있다. 터의 집 뒤에 수녀님이 주신 바위취를 10여 포기 심어 놓았는데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아직은 처음 심은 그대로이다. 아마 내년이면 화사한 바위취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다.

꽃들의향기 2005.06.03

존재하지 않는 세계

대림미술관에서 장 보드리야르 사진전을 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며 현대성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사상가가 사진전을 연다고 하는 것이 우선 흥미로웠다. 장 보드리야르는 지난달에 열린 서울국제문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그의 독창적 이론인 ‘시뮬라시옹(Simualtion)'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시뮬라시옹은 실재가 가상실재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가상실재의 세계, 즉 시뮬라크르의 환상 속인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걸프전이 한창일 때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

읽고본느낌 2005.06.02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결국은 나에게서 출발한다. 내가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 될 때 세상은 이미 꽃밭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버려두고 너와 우리를탓한들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나 하나 만이라도'라는 마음이 많아질 때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아, 절망하지 말고 내 속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가꾸자. 온 우주를 대하듯 정성드려 예쁜 꽃 한 송이를 피워내자.

시읽는기쁨 2005.06.01

진보는 단순화입니다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달력이 숨 가쁘게 휙휙 넘어갑니다.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싶으면 어느덧 주말이 다가와 있고, 월초다 싶은데 어느 순간 월말이 되어 있음에 놀랍니다. 며칠째 계속되는 초여름 날씨가 그런 느낌을 더해줍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탁상 달력에는 간디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 그림과 함께 신영복님의 ‘진보는 단순화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매일 이 글을 보며 한 달을 지냈습니다. 짧은 한 줄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한 때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시끄러웠습니다만,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정치판에서 서로 싸우는 모습은 비슷한 도토리들이 서로 자기 키가 더 크다고 다투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서울 시장이 대학 강연을 다니..

참살이의꿈 2005.05.31

경복궁 향원정

퇴근하며 옆의 동료와 경복궁에 들리다. 평일의 늦은 오후여서인지 고궁은 조용하다. 늘 단체 관람객들로 시끌벅적하던 경복궁이 인적이 그치니 제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문을 닫는 오후 6시가 가까워지니 사람들은 빠져나가고 고궁은 적막 속에 잠긴다. 경복궁의 뒤에 있는 향원정은 그래서 더욱 고즈넉하다. 1870년 대에 향원지라는 연못을 파면서 지었다는데 나무로 만든 저 다리가 향기에 취한다는 취향교(醉香橋)이다. 이곳은 왕실 전용 휴식공간으로 아마도 가장 은밀한 곳이었을 것이다. 향원정 둘레의 연못에는 노랑어리연꽃과 수련이 곱게 피어있다. 이 어리연꽃을 구경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연못 둘레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풍경이 평화롭다. 어느 분은 햇빛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연꽃의 색깔을 본다며 몇 시..

사진속일상 2005.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