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7639

항복

풀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터를 장만하고 작물을 심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농약은 사용하지 말자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제초제는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풀도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인 통제를 최소로 하면서 작물을 가꿔보고도 싶었지만 시골 마을 한가운데서 그렇게 했다가는 쫓겨나기 십상일 테니 그것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깔끔한 것이 보기에는 좋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시골에서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합니다. 화단만 하더라도 적당히 풀과 어우러져서 꽃들이 피어있는 쪽이 저에게는 훨씬 더 보기에 편합니다. 이것도 풀이 적당히 나 있을 때 얘기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방심하면 풀은 온 터를 점령해 버립니다. ..

참살이의꿈 2005.06.22

작약

작약은 늘 모란과 비교되면서 얘기 된다. 그것은 작약과 모란은 겉으로 보기에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작약은 풀이고, 모란은 나무이기 때문에 사실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옛 사람들은 둘 중에서 모란을 더 아꼈던 것 같다. 모란은 화중왕(花中王)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작약에 대해서는 별로 그런 언급이 없다. 작약(芍藥)이라는 이름 그대로 꽃 보다는 약 쪽에서 더 귀히 여기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약이 모란보다 훨씬 더 예쁘고 정감이 간다. 모란이 남성적이라면 작약은 여성적이다. 지난 번 강원도에 갔을 때, 아직도어느 집 뜰에피어 있는 작약을 만났다. 모란이 지고난 후 작약이 피는데, 그 작약도 이미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강원도는 역시 기온이 낮은지 우연히 올해의 마지막 작약..

꽃들의향기 2005.06.21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하늘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좋아..

시읽는기쁨 2005.06.20

내가 바라는 세상

나는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자랑하기보다는 좀 못 살더라도 계층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서로 도와주고 아껴주는 정신적으로 풍요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이(利)를 쫓기보다는 의(義)를 먼저 구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몇 년째 그칠 줄 모르는 부동산 광풍을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의식 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한심스럽기만 하다. 모두가 돈 앞에서는 천박하고 저열해지는 것 같다.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마찬가지다. 국민대부분이 투기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일말의 수치심이나 양심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의식주는생활의 기본일진대 이것은 인간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이다. 제발 다른 사람의 몫을 뺏아 자..

길위의단상 2005.06.18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터에 심은 감자에 꽃이 피었습니다. 세 고랑에다 주로 흰감자를 심고, 한 쪽에 자주감자를 심었는데 거름기가 별로 없는 땅인데도 잘 자라주더니 예쁘게 꽃이 피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자주감자가 익숙치 않은지 크는 모습을 보더니 작약이 아니냐며 묻습니다. 자주감자는 꽃이 자주색깔이고, 줄기도 자주색깔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 보니 줄기가 붉은 것만 아니라 잎도 작약을 닮기는 했습니다. 권태응님의 '감자꽃'이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감자 정말로 자주감자는 꽃도 줄기도 자주색깔입니다. 아직 캐보지는 않았지만 땅 속에서 크고 있는 감자도 자주색깔일 것입니다. 감자를 실제 기르며 눈으로 확인해 보니 그런 단순한..

참살이의꿈 2005.06.17

동생은 재주꾼

동생은 재주꾼이다. 뭐든 못하는 일이 없다. 동생은 어느 날 갑자기 도시 생활을 접고 가족과 강원도 산골로 들어갔다. 벌써 4년이 되었다. 그동안 자신의 손으로몇 년에 걸쳐 흙집을 지었다. 그동안은 주변이 어수선했는데 이번에 갔더니 많이 정리가 되고, 생활도 안정되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농사도 짓고, 산으로 약초도 뜯으러 다니며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리고 이제 마음의 여유도 많이 생긴 것 같았다. 집 입구에 있는 장승도 동생이 직접 만든것이다. 또 서각을 배우더니 자신의 집을 '達屯煙家'라 칭하고멋지게 글자를 새겨 길 옆에 걸어 두었다. 민박을 겸하고 있으니 집의 간판인 셈이다. 동생은 이웃들과도 잘 어울린다. 귀농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웃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데 동생은 처신을..

사진속일상 2005.06.16

자주달개비

자주달개비는 미국 원산으로 대개 화단에서 관상용으로 기르고 있다. 지금 교정에도 군데군데 자주달개비가 무리 지어 피어 있다. 야생화와 달리 이런 원예종 꽃들은 몇 주 동안 피고 지고 하기 때문에 오래 동안 감상하기에 좋다. 이 꽃의 이름이 자주달개비이지만 어떤 사람은줄여서 달개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닭의장풀을 달개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냥 달개비라고하면 자주달개비를 말하는 것인지, 닭의장풀을 말하는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얼마 전에도 어떤 사람이 이 꽃 이름을 묻길래 달개비라고 했더니, 달개비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닭의장풀을 연상했을게 틀림 없다. 이렇게 헷갈리는 것이 어디 달개비 뿐이겠는가?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은 하나지만 그 의미는 사용하는 사..

꽃들의향기 2005.06.15

매화 / 한광구

창가에 놓아둔 분재에서 오늘 비로소 벙그는 꽃 한 송이 뭐라고 하시는지 다만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여네 이쪽 길인가요? 아직 추운 하늘 문을 열면 햇살이 찬바람에 떨며 앞서가고 어디쯤에 당신은 중얼거리시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 하나가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이쪽 길이 맞나요? - 매화 / 한광구 사람이 아름다운 건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운 건 눈길을 끄는 색깔 때문이 아니라, 그 꽃을 통해 하늘의 말씀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한겨울을 견뎌낸 마른 나무가지에서 매화꽃 한 송이 피어날 때 그건 하늘이 들려주는 말씀이다. 그 들리지 않는 소리를 보러 사람들은 꽃나무 아래로 찾아간다. 일상의 때 묻은 마음을 씻어줄 큰 한 말씀 들..

시읽는기쁨 2005.06.14

3년

3년이라는 기간을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을 시작하고 그 맛에 빠져든다거나 또는 실망해서 포기해 버리기에는 충분한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심3일'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걸 큰 규모로 확대시키면 '작심3년'이라는 말도 성립될 것 같습니다. 3년 동안 어느 일에 젖다 보면 그 일에 대해 품었던 환상이 벗겨지면서 어느 정도 실상이 드러날 테니까 말입니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리고 첫발을 내디딘 사람일지라도 계속 꿈을 이루어가는 가는 사람은 또 드뭅니다. 주변을 살펴 보면 대체로 3년이 지나면서부터 활력을 잃으면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기간이면 여러 가지 예기치 못했던 문제에 부딪쳐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경우 ..

참살이의꿈 2005.06.13

[펌] 돌밭에서 줄기세포를 생각하다

차일피일하다간 모종 심을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재래시장에서 고구마와 고추 모종을 구했다. 마사토의 표면을 띠고 있었으나 밭에 손을 대는 순간, 땅 속에는 엄청난 돌이 박혀 있었다. 각오한 일이지만, 벌써 땡볕에 사흘째 엎드려 돌을 골라내도 끝이 안 보인다. 큰 돌은 작은 돌들을 뿌리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돌밭에서 곡괭이질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호미로 먼저 잔돌을 골라낸 뒤, 곡괭이질을 해야 큰 돌이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을 캐면서 최근 유례없는 감탄과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국보급 과학자’ 황우석 교수 생각이 났다. 왜 그가 떠올랐을까. 내색을 자제했지만 영 심기가 불편했나 보다. 혹은 그쪽 세계와 돌을 골라내고 고구마와 고추를 심으려는 내 돌밭의 현실과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었을 것..

길위의단상 200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