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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한 구도자가 히말라야 설산을 향해 갑니다. 그는 깨달음에 관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듣고 싶었던 게지요.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기를 반복하며 그는 하나씩 무거운 짐을 버려가며 산꼭대기를 향해 나아갑니다. 가진 것을 거의 다 버리고, 수십 만 번 가쁜 숨을 몰아쉰 다음 마침내 세속적 집착도 거의 다 놓아버렸습니다. 최후의 능선을 오른 그는 동굴에 다다라 안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엔 붓다처럼 보이는 도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구도자는 기쁨에 넘쳐 물었지요. “이 세상 최고의 진리를 알려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생애 최대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한 구도자는 이제 막 깨달음의 문턱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있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전부를 바쳐 성찰..

읽고본느낌 2005.03.10

망치질하는 사람

이 사람은 키가 22m, 몸무게는50t이 되는 거인이다.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하루 종일 내리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설치 조형물인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가다 보면 곧 만나게 된다. 작품이 워낙 커서 아무리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잠시 멈춰서 바라보게 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모양과 규칙적인 동작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처음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과연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좀 헷갈렸다. 육체 노동의 소중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은데, 다르게 생각하니 쓸쓸한 노동의 종말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수많은 화이트칼라들이 다니는 도심의 한복판에 높..

사진속일상 2005.03.09

학교대사전

요즈음 인터넷에서 '학교대사전'이 인기라고 한다.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만들었다는데 지금의 입시 위주의 학교 현실을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일종의 현실 고발적인 사전이다. 그러나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것이 거기에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교육의 아픈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미소 짓게도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심한 표현이다 싶은 것도 있지만 이 사전을 만든 학생들의 재치와 현실 너머를 보는 통찰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튼 웃으면서 자신과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사전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교육 문제를 지금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없이 이런 암담한 현..

읽고본느낌 2005.03.08

울안 / 박용래

탱자울에 스치는 새 떼 기왓골에 마른 풀 놋대야에 진눈깨비 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 이웃집 아이 불러들이는 소리 해지기 전 불켠 울안 - 울안 / 박용래 내가 화가라면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내가 사진을 잘 찍는다면 이 풍경를 찍어보고 싶고, 내가 작곡가라면 이걸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 이 시에서는 새, 풀, 눈, 닭, 사람이 울안의 한 가족이다. 거기에는 주인공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특히 '불켠 울안'이라는 표현은 참 따스하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는 안식의 쉼터다. 이 작은 평화의 울안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고, 그런 마을들이 모여 평화의 나라를 만들 것이다. 현대의 비극은 이렇게 따스하게 불켜진 울안의 상실에 있지 않는가 싶다. 모든 것이 해체되어 떠난 울안은 이제 삭막하..

시읽는기쁨 2005.03.07

물건리 방조어부림

남해도의 물건리에는 천연기념물 150호로 지정된 방조어부림(防潮漁府林)이 있다. 어촌마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는 대개 방풍림이 있지만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규모도 대단하고 나무들의 종류나 나이도 다른 방풍림에 비하여 다양하고 오래 되었다. 곡선 모양의 해안선을 따라약 1.5km 길이에 걸쳐 팽나무, 말채나무, 이팝나무, 후박나무 등 40여종의 나무 7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방조어부림'이란 뜻은 폭풍우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고기떼를 부르는 숲이라고 한다. 잘 가꾸어진 방풍림이 바다 바람이나 파도를 막아주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고기잡이에도 이용된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다. 이것은 물고기들이 녹색을 좋아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 아래로 모여드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건리 사람들에..

천년의나무 2005.03.05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으로 얼마나 커다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마찬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민박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성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 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보, 새싹 비빔밥, 뼈 발린 닭… 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잔..

길위의단상 2005.03.04

GRUMPS

다시 3월이 찾아왔습니다. 밤부터내리기 시작한 눈이 오전까지 계속되더니 지금은 햇볕이 납니다. 땅에 쌓인 눈은 햇볕을 받더니 벌써 다 녹아 버렸습니다. 봄이 이미 가까이 와 있음을 실감합니다. 저에게 3월은 마치 새해의 시작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을 보냅니다. 곁들여 좀더 아름답고 멋있게 살자고 작은 다짐도 합니다. 이 지상에서 주어진 삶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향유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 조금은 억울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람살이의 제일은 역시 행복입니다. 이 별에 와서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었다고 마지막 독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GRUMPS라는 말이 있습니다. Green(녹색의), Responsible(책임감 있는), Unassuming(겸손하고 욕심이..

참살이의꿈 2005.03.02

야생 / 백무산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야생의 들짐승 야생의 날짐승 그리고 야생의 여자 야생의 수생짐승 그들을 안아볼 때마다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는 산짐승의사나운 눈빛도 밤의 숲 속 짐승들의 거친 교미도 저들끼리 싸워 피 흘릴 때도 나무들이 뿜어대는 뜨거운 열기인 양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저들은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분화도지 않은 무수한 촉수와 날카로운 긴장의 그물을 가졌다 대상과도 자신의 몸과도 동물은 사람뿐이다 - 야생 / 백무산 그래 그래 하며 술술 읽히던 시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뒤통수를 친다 - '동물은 사람뿐이다'. 시인은 식물과 동물로 나누는 대신에 식물성이란 표현을 쓴다. 식물성이란 분리되지 않은, 분화되지 않은 자연과 하나된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자연..

시읽는기쁨 2005.03.01

운문사 처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제 180호인 청도 운문사(雲門寺) 경내에 있는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되고, 높이는 6m, 가지가 옆으로 퍼져있는 길이는 20m에 이르는 아름답고 큰 나무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우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우람한 줄기들의 위용에 압도당하게 된다. 줄기의 무게를 지탱해 주느라 많은 지주를 세워 놓았다. 오래된 절마다 이런 노미수(老美樹) 하나쯤 있다면 절의 분위기는 한층더 살아날 것 같다. 나무 줄기를 보면 남성의 근육을 연상시키듯 힘이 느껴지지만, 멀리서 보면 삿갓을 쓴 듯한 사방 대칭의 균형잡힌 모습이 여성스럽고 우아하다. 겨울인데도 솔잎의 초록색이 윤이 나듯 반질반질거린다. 그만큼 싱싱하고 생명력이 왕성하다는 뜻일 것이다. 운문사에서는 매년 봄이면 이 소나무..

천년의나무 2005.02.28

남도여행

아이들이 자라는데 따라 여행 패턴도 변하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아이들 중심으로 여행지가 결정되고 주로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이 되지만, 그러나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대개 끝이 나버린다. 이젠 부모를 따라다니지 않으려고 하거니와 부모 쪽에서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다. 학원에 가야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는데 그걸 이길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막내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이제 부부만의 오붓한 여행이 시작된다. 이때쯤 되면 인생의 한 고비가 지나갔음을 저절로 느끼게 되는 나이가 되는 것이다. 바쁜 세상살이에서 아내와 떠나는 여행이라야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다. 그러나 바쁜 세상살이란 어쩌면 핑계일지 모른다.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왜 이런 행복한 시간을 자꾸만 뒤로 ..

사진속일상 20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