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63

불주 한 달째

한 달째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모임에 참석해도 건배주 한 잔은 받지만 입술에 축이는 정도다. 전 같으면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집에서도 자주 홀짝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굳건히 참고 있다. 술이 생각나다가도 한 달 전 버스 승객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눈초리를 떠올리면 고개를 절레절레 젖게 된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장면은 또렷이 남아 있다. 너무 부끄러워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선배가 수돗가에 데려가 씻어주었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이젠 술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체력이 안 받쳐준다. 한순간에 뿅 가버리고 그 뒤부터는 집에도 찾아가지 못한다. 몽유병 환자가 된다. 그러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잔다. 어느 때는 주차된 차 밑에 들어가 자다가 차 주인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기도 했..

길위의단상 2013.07.09

우리나라 100대 명산

난 목표를 정하는 게 싫다. 그런 걸로 남이나 나를 다그치는 건 영 질색이다. 성인이 된 뒤로는 무엇이 되려고 끈질기게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사이 들어 등산 목표를 하나 세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있다. 우리나라의 100대 명산 목록을 보고 나서부터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에 100산 정도는 올라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음이 100대 명산 목록이다. 좁은 국토인데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여럿 있다. 내가 정상을 찍었던 산은 붉은색으로 표시해 보았다. 수도권 15 감악산, 관악산, 도봉산, 마니산, 명성산, 명지산, 백운산, 북한산, 소요산, 용문산, 운악산, 유명산, 천마산, 축령산, 화악산 강원권 22 가리산, 가리왕산, 계방산..

길위의단상 2013.06.24

징검다리

경안천을 산책할 때면 일부로라도 한 번은 이 징검다리를 건넌다. 옆에 번듯한 다리가 있지만 돌아서라도 이 징검다리를 찾게 된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사이를 사뿐사뿐 건너뛰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어릴 적 고향 마을 앞 개울에도 이런 징검다리가 있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쉽게 물에 잠겨 무릎 위까지 바지를 말아 올리고 건넜다. 심할 때는 아예 바지를 벗어 머리 위에 이고 건너기도 했다. 더 어렸을 때는 아버지 등에 업혀 건넜던 기억도 난다. 여름에 홍수라도 나면 당연히 학교로 가는 길이 끊겼다. 시멘트 다리가 있는 읍으로 해서 돌아가자면 두 시간이나 더 걸렸다. 저학년 아이들은 등교하는 걸 포기했고 학교에서도 말렸다. 학교에 안 가도 되는 동생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 뒤..

길위의단상 2013.06.12

갑과 을

아내는 스마트폰이지만, 나는 아직 구식폰을 쓰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위치가 역전되는 게 자꾸 생긴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어느 선생님이 '사람 인'[人]자를 둘이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한 게 생각난다. 지금은, 아내는 길고, 나는 짧다. ...................... 옛날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이젠 만나기 어렵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았는데 나는 마치 구석기 시대에서 온 원시인 같다. 모임에 나가보면 다들 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놓고 쳐다보기 바쁘다. 뭘 그렇게 하는 건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얼마 전 순댓국밥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젊은이 둘이 들어왔다. 둘은 마주 앉긴 했으나 폰만 만지작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둘이 얼굴을 쳐다본 건 메뉴를 고를..

길위의단상 2013.06.02

직업병

얼마 전부터 손목과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추리해보니 책 보는 습관 때문이 아닌가 판단된다. 게으르다 보니 책을 볼 때는 주로 누워서 두 손으로 떠받치고 본다. 팔과 손가락에 큰 힘이 들어가야 하는 자세다. 편한 것만 찾다 보니 팔이 고생을 한다. 그래서 요사이는 배 위에 베개 두 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책을 놓고 본다. 그래선지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다. 게으른 백수의 직업병이다. 또 손가락 중에서는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제일 아프다. 이 원인도 추리해 보니 너무 자주 마우스를 클릭한 탓인 것 같다. 하루에 서너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보고, 필요한 정보를 찾는데 그 정도 시간이 든다. 그러다 보니 손가락 한 개가 혹사를 당한 모양이다. 업무..

길위의단상 2013.05.17

돌고도는 인생

인생은 반환점을 찍고 오는 마라토너처럼 결국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성공을 꿈꾸고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하지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게 인생이다. 독일의 히르슈하우젠이 이런 재미있는 말을 했다. ㅎㅎ... "인생은 돌고 돕니다. 한 살짜리 아기의 성공은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고, 25세에는 성행위, 50세에는 돈이 성공이며, 75세에는 여전히 성행위를 하는 것이, 그리고 90세에는 다시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 성공입니다."

길위의단상 2013.05.07

자꾸 늘어나는 모임

퇴직하면서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 인생의 한 매듭에서 정리할 건 정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마침 서울을 벗어나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잘 됐다 싶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과 만나는 모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핑계인지 모르지만 인간관계를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겉과 달리 내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마저 만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 갇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부부 모임이 생겼다. 성당에 다니는 여인네들끼리 반모임을 하다 보니 서로 친해지게 되었고 남자들도 포함시키자고 해서 부부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나로서는 꺼려지는 조건만 갖추고 있어 나가지 ..

길위의단상 2013.04.25

통찰력

김규항 씨는 사물과 현상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분의 글은 주제에 맞는 낱말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제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군더더기가 없다. 글을 참 잘 쓰는구나, 라는 감탄이 절로 난다. 글 쓰는 사람의 준범으로 삼을 만하다.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갔더니 역시 눈에 띄는 글이 여럿 발견된다. 요사이는 경구 비슷한 단문이 많다. 좋은 글은 세상에 대한 통찰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최근에 올린 글 중에서 몇 개를 골라 보았다. 돛과 닻 자전거를 탈 때 바람이 뒤에서 불면 몸은 돛이 되고 앞에서 불면 몸은 닻이 된다. 자전거를 탈 때만은 아니다. 몸은 언제나 우리의 돛이자 닻이다. 최악의 그늘 진보적 시민들이 최선보다 차악을 선택하는 현상은 진보의 현실적 모색이라 설명되곤 하지만 실은 ..

길위의단상 2013.04.15

일주일째

일주일째 문밖을 못 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누워 있길 좋아하는 친구라 같이 지내자니 하루의 2/3는 나도 따라 누워서 빈둥거린다. 그래도 마음 하나만은 편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결근 신청을 하는 데도 괜히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를 가지고 억지로라도 출근했을 것이다. 누워 있어도 베란다 창을 통해 바깥 경치는 다 보인다. 봄 햇살이 따스해 보이는데 직접 쬐지는 못한다. 씩씩한 걸음으로 뒷산을 향하는 사람들을 본다. 아쉬운 점은 이번 주에 산청 삼매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이미 그쪽 매화는 졌다는 소식이다. 내년으로 자동 연기되었다. 또, 한식에 선친 산소를 찾아가는 것도 미뤄지게 됐다. 청계산과 천마산의 봄꽃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새로운 구경거리..

길위의단상 2013.04.06

분홍색 연기

지난 13일에 새 교황이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이 생존한 상태에서 사임한 것이 특이했는데 바티칸 내부의 권력 암투 때문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구중궁궐 깊숙한 곳의 얘기라 어차피 추측성 기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새로 뽑힌 교황의 본명이 '프란치스코 1세'로 명명된 게 오히려 더 신기했다. 프란치스코(1181~1226)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중세 시대의 성인이다. 철저한 무소유 정신으로 예수의 정신에 가장 일치하게 살았던 분이었다. 프란치스코의 평화와 생명의 영성은 가톨릭의 빛나는 자산 중 하나다. 가톨릭 신자는 존경하는 성인의 이름을 따라 자신의 본명을 짓는다. 교황도 마찬가지다.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옛 이름을 버리고 존경하는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본명을 새로 짓는다..

길위의단상 2013.03.27

피겨 퀸 김연아

8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새해를 맞아 동료들과 직장 상사의 집에 세배를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상사는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여자 피겨 연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동계 올림픽 중계였다. 나오는 선수들은 모두 미끈한 몸매의 서양인이었다. 그걸 보며 우리는 동양인이 과연 저 무대에 설 수 있을지에 대해 설왕설래했었다. 더구나 한국인이 세계 피겨 무대에 설 수 있을 때는 언제쯤 될 건지에 대해서도 말을 나누었다. 아마 대부분의 예상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세계선수권에서 김연아가 다시 우승했다. 총점 218.31로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2위와는 무려 20점 넘는 차이가 났다. 한마디로 차원이 다른 연기였다. 실수나 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봤는데 다른 선..

길위의단상 2013.03.17

스쳐 지나가는 풍경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남산 자락 후암동 친척집이었는데 결혼식이 있었는지 집안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신기해서 내 또래 아이와 오리락내리락 하며 놀았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그러다가 굴러떨어져서 외할머니를 놀라게도 했다. 그때는 시커먼 몸통을 가진 칙칙폭폭 증기기관차가 객차를 끌었다. 쉴새없이 연기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가끔씩 힘들다는 듯 목쉰 기적 소리를 토해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였는지, 나는 객차 유리창문을 위로 열어놓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는 우리를 끌고가는 철마를 구경했다. 옆으로 끝없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좋았다. 잠시만 그런 게 아니라 서울 가는 내내 바깥 구경에 넋을 잃었다고..

길위의단상 2013.03.12

여행 후유증

캐나다와 미국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시차로 인한 후유증이 크다. 낮에 찾아오는 두통과 잠이야 억지로 견딘다지만 한밤중에 깨어나 말똥말똥해지는 건 무척 기이한 경험이다. 어느덧 닷새 째다. 나 같은 잠보가 이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다. 캐나다로 갔을 때는 몸살이 나서 계속 감기약과 수면제를 먹고 잤기 때문이었는지 시차를 거의 느끼지 않았다. 열흘 동안 그쪽 리듬에 적응했는데 다시 원대복귀 되었으니 몸이 놀랄 만도 하다. 이놈의 주인이 미쳤나, 하고 헷갈릴 것이다. 오늘도 2시에 깼는데 도저히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네 시간밖에 자지 않은 셈이다. 밤 2시는 LA에서는 아침 9시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막 활동을 시작했을 때이니 잠이 들 리가 없을 것이다. 한 시간 동안 뒤척거리다가 결국은 불을 켜고 책..

길위의단상 2013.03.08

한 갑자가 지나다

한 갑자가 돌았다. 60년 전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났는데 다시 계사년이 찾아왔다. 12와 60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과 관계된 숫자다. 해를 나타내는 12개의 지(支)가 있고, 일 년은 12달로 나눈다. 밤낮도 12시간으로 되어 있다. 또, 시간이나 분은 60등분을 한다. 이런 것이 순환 구조를 이루면서 60년이라는 큰 수레바퀴를 만든다. 60년 인생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건 사실이다. 축하 인사도 없고 회갑 잔치도 사라졌다. 수명이 늘다 보니 예전 60이 지금은 80 언저리쯤 될 것 같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도 옛말이 되었다. 이젠 대부분이 고희(古稀)를 넘기고, 100세 넘은 분을 만나는 것도 드물지 않다. 회갑을 언급하는 자체가 쑥스럽다. 그래도 60은 인생의 한 매듭으로 충분히 의미..

길위의단상 2013.02.12

조르바

이런 말을 남긴 조르바는 누구인가?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걸기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 버렸어요." "하느님요? 자비로우시고말고요. 하지만 여자가 잠자리로 꾀는데도 이거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시지 않을걸요. 거절당한 여자는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쉴 테고, 그 한숨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들어가면, 그 자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았대도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고요." "도 닦는 데 방해가 된다고 그걸 잘랐어? 이 병신아, 그건 장애물이 아니라 열쇠야, 열쇠."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길위의단상 2013.02.05

안전한 사회와 지속가능한 에너지정책을 위한 8대 과제

우리 시대 인류가 당면한 최대 위험이 핵이다. 잘못하면 인류 멸절의 대재앙이 올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꼬리 없는 원숭이는 너무 쉽고 어설프게 원자력의 비밀을 손에 넣었다. 강대국들은 지구를 몇십 번이나 날려버릴 만한 핵무기를 감쳐두고 있다. 그 버튼이 눌러지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굳이 핵무기만이 아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는 대참사의 전주곡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핵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핵발전소도 같은 연장선에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를 우리 옆에 묻어두는 것과 같다. 지금의 경제성과 편리함 때문에 후손에게 너무 큰 짐을 맡기고 있다. 핵은 한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다. 인류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북한은 핵실험을 앞두고 있고, 남..

길위의단상 2013.02.01

화성의 강

며칠 전에 ESA[The European Space Agency, 유럽우주기구]에서 화성 탐사선인 '마스 익스프레스'[Mars Express]가 촬영한 화성 표면 사진을 공개했다. 화성 남반구에 있는 '레울 계곡'[Reull Vallis] 부근인데 거대한 강물이 흐른 흔적이 보인다. 화성은 지구보다 작지만 자연 현상 규모는 훨씬 더 크다.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화산인 올림푸스산이 있다. 높이가 27,000m로 에베레스트의 세 배다. 이 강의 길이는 1500km, 폭은 7km, 깊이는 300m에 달한다. 과학자들은 오래전에 화성이 물이 흘러 이런 협곡이 만들어졌다가 35억 ~ 18억년 전 사이에 수분이 증발하고 흔적만 남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진은 ESA 홈페이지에 들어가 받아왔다. 사진에는 ..

길위의단상 2013.01.22

위기십결

바둑은 선택이다. 바둑 한 판 두자면 백 개가 넘는 돌을 놓아야 하는데 그만큼의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는 말과 같다. 오직 이 한 수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러 개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이 상대의 수와 어울려 한 판의 바둑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바둑은 선택과 조화다. 바둑을 둬보면 우리네 인생살이와 닮았다는 걸 느낀다. 인생길에서도 수많은 갈림길에 선다. 이 길을 갈까, 저 길을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한 길을 선택한다. 한참 지나서 보면 다른 길이 훨씬 나았음을 알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선택하고 후회와 자책을 거듭하며 종착지에 이른다.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 지침으로 삼는 게 위기십결(圍棋十訣)이다. 바둑의 십계명이라 할 수 있다...

길위의단상 2013.01.15

토론TV가 있었으면

이번 대통령 선거에 누가 당선되느냐에 관심이 있다 보니 낮에도 TV를 자주 보게 되었다. 지상파 방송은 대선 관련 보도를 거의 안 해서 종편을 주로 봤다. 종편이 여당 편향이라는 걸 알지만, 여와 야를 대변하는 사람들 사이의 토론은 그런대로 봐 줄 만했다. 내가 보기에는 4개의 종편 중에서 그나마 MBN이 가장 나았던 것 같다. 선거 기간 중 종편에 자주 출연했던 사람들이 있다. 정치전문가, 정치평론가라고 부르던데 일부는 정말 자질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 치 혀만 믿고 까불어대는 세객(說客)이라 불러 적당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당파에 너무 편향적이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발언을 해서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이번에 박근혜 정권 인수위의 수석대변인으로 뽑힌 윤창중이었다. 이 사람..

길위의단상 2012.12.30

선거의 추억

제18대 대선이 끝났다. 박근혜 후보가 51.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분이지만 축하를 보낸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은 14,950,303명이 있음을 잊지 말고,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어 주길 부탁드린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 민생, 민생 하는데 그것보다 민본(民本)이 우선이다. 나에게도 선거에 대한 직접적인 추억이 있다. 어렸을 때 일이다. 4.19 직후 시행된 지방자치제에 따라서 면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선친이 거기에 출마한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는데 집안이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거린 정도와 선거 마지막 날 장면이 기억난다. 투표가 끝나고 선친은 졌을 거라며 술을 드시고 일찍 귀가해서 잠이 들었다. 개표 결과를 볼 필요도 없다고 포기..

길위의단상 2012.12.23

[펌] 도올의 혁세격문

혁세격문(革世檄文) 지금 조선의 들판이 혁명의 불길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지금 조선의 먼동은 "다시 개벽"의 눈부신 햇살을 발하고 있다. 자고 있는 자들이여, 모두 깨어나라! 새 시대, 새 정치의 함성이 그대를 부른다. 깨어난 4천만의 유권자들이여,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투표장으로 가라!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혁명의 물결이 이 아사달 신시를 휘덮으리라! 조선의 깨인 자들이여! 남김없이 혁명의 대오에 어깨를 엮어라! 환인 하느님께서는 이 신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건국 치세이념을 내리셨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길위의단상 2012.12.17

할아버지 사형제

할아버지대에는 네 형제분이 계셨다. 선비였던 증조부를 닮으신 분이 장남인 첫째 할아버지셨다. 당시 풍습대로 부모 재산은 대부분 첫째 할아버지가 물려받았다. 동생들은 형님댁 일을 거들어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첫째 할아버지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고 글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풍농월하는 양반이었다. 비가 와도 마당에 넌 곡식 하나 거둘 줄 모르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남마저 집안 일에 관심이 없고 밖으로 나돌다가 결국은 문전옥답을 비롯한 전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형님 집에서 나오는 삯으로 생활하던 동생네까지 졸지에 집안이 몰락했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할아버지 형제네는 내 땅 한 평 없이 무척 가난한 처지였다. 양반이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집이 부유하다면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지만, 빈곤하게..

길위의단상 2012.12.07

제주 올레길 420km

며칠 전에 제주도 올레길 전 구간이 완성되었다. 26개 코스에 총 길이가 420km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길이와 비슷하다. 한 개 코스가 하루에 걷기 적당하게 되어 있으니 전체를 걷는 데는 한 달 정도가 걸린다. 당연히 걸어보고 싶다. 결심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하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올레길 몇 개 코스 정도는 걸어 보았다. 나만 아직 올레길에 서지 못했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몇 년 전에는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유행했다. 퇴직을 한 뒤에 바로 그 길을 걷는 게 목표였었는데 아직도 희망 사항으로만 남아 있다. 거기는 평균거리가 거의 900km가 되니 올레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솔직히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동안 생각도 변했다..

길위의단상 2012.11.27

화를 내라, 그러나 잘 내라

내 단점은 불뚝 성질이다.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밖에서는 얌전한데 집 식구에게 그런다. 전형적인 졸장부의 모습이다. 전에는 잘 참아주던 아내가 이젠 같이 맞받아친다. 부부싸움으로 확전이 되기도 한다. 말투 하나에서 시작하여 집안에 찬바람이 분다. 내 불뚝 성질은 아내의 가장 큰 스트레스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아내는 내 안에 무언가 억압을 받고 있는 게 있다고 말한다. 나는 아니라고 변명하지만 속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싶지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니어서 괴롭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 달리 마음은 그렇지 않는 걸 아내도 알 것이다. 따뜻이 대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말은 반대로 나온다. 어제도 작은 폭풍이 지나갔다. 아내가 외출하고 ..

길위의단상 2012.11.22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나는 만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는 일곱 살이 입학연령이었고,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오히려 한 해 늦은 여덟 살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는 면사무소에 근무하시던 선친이 미리 가서 한글이라도 익히라도 임시로 한 해 먼저 보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편법 입학생이었다. 그런데 학교도 그럭저럭 다니고 공부도 뒤처지지 않으니까 담임이 그대로 진급시키라고 해서 졸지에 정식 학생이 되어 버렸다. 본의 아니게 동기들보다 한 살 아니면 두 살이 어린 처지가 된 것이다. 마을의 같은 또래는 자동으로 내 후배가 되었다. 키도 작고 마음도 여린 아이가 한두 해 먼저 자란 아이들 사이에서 지내는 게 만만치 않았다. 놀이에서는 늘 뒤쳐졌고, 정신 나이도 한두 레벨은 아래였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무..

길위의단상 2012.11.14

Daughter of Dictator

우연히 어제 날짜 'Asianews'에서 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씨를 'the daughter of a dictator'(독재자의 딸)로 소개하고 있는 걸 보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통상적으로 외국 언론들은 그렇게 쓰고 있었다. 'Dictator's Daughter', 'Daughter of Dictator'가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박정희는 'President'로 보다는 'Dictator'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언론은 좀 더 자세히 'Military Dictator'(군인 독재자), 'Assassinated Dictator'(암살된 독재자)로 적고 있다. 영어 사전에서 'dictator'를 찾아보면 예문에는,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튀니지의 벤 알리, 리비아의 가다피..

길위의단상 2012.11.02

결혼하는 아들에게 주는 당부

근래에 가까운 지인 두 분의 아들 혼사가 있었다. 두 경우 모두 주례 없이 부모가 직접 아들 부부에게 주는 축하와 당부의 말로 대신했다. 형식적인 주례사보다는 훨씬 나았다. 정형화된 결혼식 문화가 탈피되는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두 가정에서는 배울 바가 많다.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소통이 잘 되는 점이 그렇다. 지금도 마치 친구처럼 다정하다. 내 경우는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진지한 대화를 해 보지 못했다. 그때는 아이들을 탓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내 탓이 더 컸다.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다. 지금도 아이들은 나를 무척 어려워한다. 문제 학생 뒤에 문제 가정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바른 젊은이 뒤에는 건강한 가정이 있다. 그 사례를 이 두 집에서 본다. 특히 한 분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길위의단상 2012.10.30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고

자식을 다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지도 1년이 돼간다. 전보다 삶이 단출하게 변했다. 각자 가정을 꾸려서 제 몫을 하며 살아가니 자식에 대한 염려는 많이 줄어들었다. 집이 썰렁하게 느껴지던 단계도 지나고 이젠 둘만의 조용한 시간을 즐기며 산다. 두 노인만 있으니 어떤 날은 종일 절간에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은 주말에 가끔 찾아온다. 와서 자고 갈 때도 있다. 두 식구에서 네 식구로 불어나면 집안이 소란해진다. 처음에는 활기가 있고 좋지만, 나중에는 부산스러워서 피곤하다. 속마음으로는 인제 그만 돌아갔으면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가라고 할 수는 없다. 알아차릴 듯 말 듯하게 눈치만 줄 뿐이다.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도 남녀의 차이가 큰 것 같다. 우리 부부의 경우를 보면 특히 그렇다. 아내는 오매불..

길위의단상 201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