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별 / 윤주상

우리가 이 별 저 별 하듯이 너희도 이 인간 저 인간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가 너희더러 반짝인다고 말할 때 너희도 우리가 몸부림친다라고 표현한다는 것도 나는 안다 오리온좌 카멜레온좌 카시오페아좌 등으로 쓸데없이 우리가 너희를 갈라 놓았듯이 너희는 우리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우는 자와 웃는 자 오른쪽과 왼쪽 남과 북 등등으로 늬들보다 더 복잡하게 갈라져 있음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별이여 나는 알 수가 없구나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고 우리가 너희를 노래하는 밤에도 왜 너희는 결코 우리를 노래해 주지 않는지를 너희가 가장 밝게 빛나는 밤에 우리는 이 땅의 가장 어두운 길을 가고 있음을 별이여 너희는 과연 알기나 하는 일인지 - 별 / 윤주상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리 위에..

시읽는기쁨 2017.01.06

나무 기도 / 정일근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린 너무 빠르다, 세상은 달려갈수록 넓어지는 마당 가졌기에 발을 가진 사람의 역사는 하루도 편안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냥 나무처럼 붙박혀 살고 싶다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어린 자식 기르며 말씀 빚어내고 빈가지로 바람을 연주하는 나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세상은 또 너무 입이 많다 입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적을 만들고 그리하여 입 속에서 전쟁이 나온다 말하지 않고도 시를 쓰는 나무의 은유처럼 온몸에 많은 잎을 달고도 진실로 침묵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은 베풀 때 완성되느니 그늘 주고 꽃 주고 열매 주는 나무처럼 추운 아궁이의 뜨거운 불이 되어주기도 하고 사람의 따뜻한 가구가 되는 나무처럼 가진 것..

시읽는기쁨 2017.01.01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 정말 왜 그럴까 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세밑에 이르렀다. 아쉬움과 회한이 많이 남는 해다. 나이를 먹는다..

시읽는기쁨 2016.12.30

기도 / 김수영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

시읽는기쁨 2016.12.21

술값 / 신현수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하고 술값도 안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낸 날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그만 깨뜨려버리고 싶은 날이다. 술값 / 신현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염치다.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무지, 오만, 비굴, 탐욕의 인간 군상들을 매일 TV로 접한다. 참으로 뻔뻔하다. 갑남을녀 대부분은 술값 몇 푼으로 조바심친다. 조무래기라 그런 걸까? 염치는 헌신짝처럼 차버려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가 보다. 차라리 위선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시읽는기쁨 2016.12.14

슐레지엔의 직조공 /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부자인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주기는 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

시읽는기쁨 2016.12.01

내가 만약 / 디킨슨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괴로움 달래줄 수 있다면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 내가 만약 / 디킨슨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r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onto his nest, I shall not live in vain. - If I can / Emilly Dickinson 은둔과 고독의 삶을 택한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한다. 까마귀 떼를 떠나 백로 한 ..

시읽는기쁨 2016.11.21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 허만하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 허만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이 되어야 날개를 편다." 이 시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문득 헤겔의 이 말이 떠올랐다. 높고 밝은 세계는 정신의 빈곤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도시의 달동네, 꼬챙이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의 힘을 생..

시읽는기쁨 2016.11.15

찬지름 들지름 / 송진권

찬지름 들지름 들이 서울 갑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변에 모랫벌에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여름내 김매고 땀 흘려 가꾼 참깨 들깨 들이 찬지름 들지름이 되어 소주병에 담겨 서울 가는 기차를 탑니다 마른 나무 강변말 해바라기 선 집 들지름 발라 김 구워 주면 미어지게 먹던 막내를 생각합니다 날달걀 깨서 찬지름 떨어뜨려 밥 비벼 주면 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해치우던 맏이를 생각합니다 - 찬지름 들지름 / 송진권 가을은 아프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지은 농작물을 갖고 오는 것도 죄스럽다. 가을이 되면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더해진다. "나도 이제 따스한 밥 얻어먹고 싶다." 가을은 불효를 자각하고 속울음을 삼키게 되는 계절이다. 충청도에서는 '찬지름 들지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자식을 향한 모정이 '..

시읽는기쁨 2016.11.07

슬픔 / 정현종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 슬픔 / 정현종 37년 전 오늘 박정희와, 37년 뒤 박근혜의 지금 상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설마 그런 일이, 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높으신 분이 화를 내더니 며칠만에 현실이 되었다. 분노와 허탈 뒤에는 늘 슬픔이 찾아온다. 무엇보다 깜냥도 못 되는 것들에 의해 한 나라가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막힌 머리와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이 결합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보고 있다. 돌아보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선택이었다. "영원한 건 ..

시읽는기쁨 2016.10.26

부지깽이 / 이문구

시골집 나뭇간엔 작대기감도 말뚝감도 안 되어 그냥 노는 막대기가 많은데 어느 날 부지깽이가 되면 부뚜막에 오른 개 엉덩이도 때려 주지만 불을 때며 아궁이를 들락거리며 불땀 없는 땔감을 괄게 태우고 잉걸불 끌어내어 화로에 담으면서 제 몸을 태우고 또 태우고 해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다가 드디어 아궁이에 던져져서 불덩이가 되곤 했지 - 부지깽이 / 이문구 고향집 사랑방은 지금도 아궁이에서 불을 때 난방을 한다. 마당에는 어머니가 해 놓은 나뭇더미가 가득하다. 내려가면 군불을 넣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예 내 담당이 되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은 성냥 대신 일회용 라이터를 쓰고, 부지깽이보다도 철로 된 집게를 더 자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부지깽이가 없어서는 안 된다. 부지깽이를 쥘 때는 어린 시절을 내 손에..

시읽는기쁨 2016.10.18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한번도 좌파 소리 들어보지 못하고 산 게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큰소리 치다가는 좌..

시읽는기쁨 2016.10.10

그림 / 신경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그림 / 신경림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림 속 사람이 현실로 튀어나왔다 들어가곤 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이런 건 판타지 영화에서 잘 써먹는 수법이다. '타임머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시읽는기쁨 2016.10.03

육탁 / 배한봉

새벽 어시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

시읽는기쁨 2016.09.25

이 느림은 / 정현종

이 느림은, '진짜'에 이르기 어려워 그건 정말 어려워 미루고 망설이는 모습인데 앎과 느낌과 표정이 얼마나 진짜인지에 민감할수록 더더욱 느려지는 이 느낌은.... - 이 느림은 / 정현종 그러고 보니 '느림'과 '느낌'이라는 두 단어는 많이 닮아 있다. 진짜 느낌은 느리게 찾아온다는 뜻인지 모른다. 알게 될수록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고, 진짜 앎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15장에 옛 성인을 묘사한 이런 말이 나온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客.....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알 수 없으니 드러난 모습으로 억지로 형용을 하자면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 대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

시읽는기쁨 2016.09.18

별 / 류시화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별은 내 눈물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주의자에게 가서 물었다 신비주의자는 별 따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차라리 네 안에 있는 별에나 관심을 가지라고 그 설명들을 듣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눈으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인도의 어느 노인처럼 명상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만으로 만족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

시읽는기쁨 2016.09.11

하늘길 / 함민복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라 가는 길이라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보았다 - 하늘길 / 함민복 지지난달에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였다. 캔맥주를 부탁했다가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승무원에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맥주도 안 주는 이따위 비행기가 어디 있냐고, 했을 것이다. 이 시를 접하니 그때 일이 더 뜨끔해진다. 시인은 하늘길에서 음식 먹는 것도 미안하고, 불경스러워 소변도 참았다는데 내 꼬락서니는 뭐였단 말인가. 아, 똑같은 길을 가도 사..

시읽는기쁨 2016.09.05

여행 / 박경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여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

시읽는기쁨 2016.08.29

여보라는 말 / 윤석정

연애시절, 나는 은근슬쩍 당신에게 여보라고 불러봐 했더니 그 말이 어색했던 당신은 여보를 거꾸로 바꿔서 보여? 라고 묻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는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당신은 나지막하게 사랑해라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던 날 당신은 내가 되어도 내가 아니 되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먹먹해져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니 된다고 당신이어야만 한다고 소리쳤다 당신은 내 마음이 보여? 라고 묻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랑해라고 속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이 세상 기꺼이 나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깜깜한 나에게 전부를 보여준 당신 당신은 겨울 꽃처럼 단아한 신부가 되었고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둔 세상에 살지라도 당신이 내민 손을 꼬옥 붙잡고 가겠다..

시읽는기쁨 2016.08.21

보살 / 김사인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 날을 나도 힘도 안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하요. 그저 좋아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찌르르 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 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 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 길로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면 혀라우. - 보살 / 김사인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오염된 세상에서 이런 건 뭐라 불러야 할까. 인간이 아가페의 흉내를 낸다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시읽는기쁨 2016.08.16

금붕어 길들이기 / 이안

처음엔 풀 밑으로 숨기 바빴지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며칠 지나니 이제는 살랑살랑 마중을 오네 먹이 몇 번 주었을 뿐인데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 거야 길든다는 말 길들인다는 말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다는 거였어 살랑살랑 길을 들인다는 거였어 - 금붕어 길들이기 / 이안 어린왕자는 여우를 만나서 '길들인다'는 게 뭔지 묻는다. 길들여져 있지 않아서 같이 놀 수 없다고 여우가 말했기 때문이다.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 넌 아직 나에게는 다른 수많은 꼬마들과 다를 바 없는 한 꼬마에 불과해. 그러니 나에겐 네가 필요없어. 또한 너에게도 내가 필요없겠지.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시읽는기쁨 2016.08.09

우리나라 풀 이름을 위한 서시 / 윤주상

우리나라 풀 이름들 외고 있으면 씨감자로 배를 채운 저녁나절처럼 왜 그렇게 속이 쓰리고 아려오는지 쥐오줌풀, 말똥가리풀, 쇠뜨기풀, 개구리발톱, 개쓴풀, 개통발, 개차즈기, 개씀바귀, 구리때, 까마중이, 쑥부쟁이, 앉은뱅이, 개자리, 애기똥풀, 비짜루, 질경이, 엉겅퀴, 말똥비름풀..... 왜 그렇게 하나같이 못나고 천박하고 상스러운 이름들뿐인지 며느리밑씻개풀, 쉽싸리, 개불알풀, 벌깨덩굴, 기생초, 깽깽이풀, 소루쟁이, 쇠비름, 실망초, 도둑놈각시풀, 가래, 누린내풀, 쥐털이슬, 쑥패랭이, 논냉이, 소경불알, 개망초, 색비름풀..... 왜들 그렇게 모두가 하나같이 낯뜨겁고 부끄러운 이름들뿐인지 쥐꼬리망초, 명주실풀, 며느리밥풀, 좁쌀풀, 속속이풀, 송장풀, 주름잎, 쐐기풀, 쑥부지깽이, 개밥풀, 겨우살..

시읽는기쁨 2016.08.02

탄식 / 손세실리아

사경을 헤맨 지 보름 만에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옮기시던 날 효도한답시고 특실로 모셨다 - 아따 좋다이 근디 겁나게 비쌀 턴디 - 돈 생각 말고 푹 쉬어 - 후딱 짐 싸라 일반실로 내려가게 - 근천 그만 떨어 누가 엄마한테 돈 내래? 뜬눈으로 간병한 사람은 안중에도 없지? 늙으면 남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만 안다더니 틀린 말 아니네 설득하고 대꾸하고 통사정하다가 풀죽은 넋두리에 벼락 맞은 듯 기겁해 황급히 입원 도구를 꾸렸다 - 아가 독방은 고독해서 못써야 통로 끝집 해남떡이 베란다서 떨어진 것도 다 그 때문 아니것냐 - 탄식 / 손세실리아 오랜만에 시집을 한 권 샀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이다. 손 시인의 시는 참 쉽다. 술술 읽힌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작은 조약돌처럼 시들이 예쁘다. 이 시 '탄식'에서..

시읽는기쁨 2016.07.27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옛날 여름 저녁 풍경이 담박하게 펼쳐진다. 평안도 토속어가 감칠 맛 나는 백석 시다. 이때 도시라면 창문 닫아걸고 에어컨을 켤 것이다. 어찌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당 멍석자리에 누워 모깃불 연기 맡으며 하늘의 별을 쳐다보던 그때가 아련하다. 할머니의 부채 바람이 낯을 간지렸고. 어른들의 알 듯 모를 듯한 세상..

시읽는기쁨 2016.07.18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던 저녁이었다. 그 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듯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얼마 전 ..

시읽는기쁨 2016.07.12

관작루에 오르다 / 왕지환

붉은 해는 산을 의지해 다하고 누런 강은 바다로 들어가 흐르는데 천리 더 멀리 바라보고자 다시 더 한 층을 올라가네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 登관雀樓 / 王之渙 대칭의 조형미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우주의 기본 속성이 대칭성이다. 과학자들도 자연의 대칭성을 주목한다. 거시나 미시 세계 모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한시가 아름다운 건 대칭의 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율시의 생명은 대구(對句)라고 한다. 이 시가 좋은 예다. 왕지환은 당나라 때 시인이다. 이 시는 간결하고 쉽다. 은유도 무슨 의미인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인간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인의 의지가 읽힌다. 세월은 흐르고 몸은 늙어가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정신만은 쇠하지 않는다. 인생은 쉼없이 배우고 ..

시읽는기쁨 2016.07.03

커피 기도 / 이상국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속으로 그러다가 기도를 마친 모녀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서야 나도 커피를 마셨다 - 커피 기도 / 이상국 천주교에 입교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성호경을 긋고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배웠다. 배운 대로 온전히 실천하던 때였다. 청계산에 등산을 갔는데 여름이라 목이 탔다. 마침 산정 가까이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보통 하던 대로 돈을 내다가 흠칫했다. 막걸릿잔을 들고 성호경을 긋는 게 너무 이상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까, 결국은 ..

시읽는기쁨 2016.06.22

사는 맛 / 정일근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 사는 맛 / 정일근 혀에는 미뢰가 있어 단맛, 짠맛, 쓴맛, 신맛, 매운맛 등을 느낀다고 한다. 인생의 맛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단맛만 밝히면 절름발이가 된다. 독이 든 복어를 먹는 사람처럼 삶의 고수는 짜고, 쓰고, 시고, 매운 인생의 맛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설사 즐기..

시읽는기쁨 2016.06.16

행복 /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행복 / 나태주 짧은 시 만큼이나 행복은 의외로 간단한지 모른다. 크고 거창한 게 아니다. 행복은 하늘 위 높은 곳에 있지도 않다. 소소한 일상에서 조금씩이지만 자주 만나는 만족감에서 행복은 출발한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특별함으로 다가오느냐, 거기에 행복의 마음이 있다.

시읽는기쁨 2016.06.10

외딴 유치원 / 반칠환

아랫목에 밥 묻어 놨다.... 어머니, 품 팔러 새벽 이슬 차며 나가시고 막내야, 집 잘 봐라 형, 누나 학교 가고 나면 어린 나 아버지와 집 지키네 산지기 외딴집 여름해 길고 놀아줄 친구조차 없었지만 나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네 외양간에 무섭지만 형아 같은 중송아지, 마루 밑에 양은냄빈 왈칵 물어도 내 손은 잘근 씹는 검줄이, 타작 끝난 콩섶으로 들락거리던 복실꼬리 줄다람쥐, 엄마처럼 엉덩이 푸짐한 암탉도 한 마리 있었다네 아아 낯설고 낯설어라, 세상은 한눈 팔 수 없는 곳.... 원생은 나 하나뿐인 외딴 유치원, 솔뫼 고개 우리 집 아니 아니, 나 말고도 봄에 한배 내린 병아리 떼가 있었네 그렇지만 다섯살배기 나보다 훨씬 재빠르고 약았다네 병아리 쫓아, 다람쥐 쫓아 텃밭 빠대다보면, 아버지 부르시네 ..

시읽는기쁨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