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미황사 / 박남준

미황사까지는 아직 멀다 마음은 저 산너머로만 가 닿는데 이제 나아갈 길은 없구나 밤바다가 낯선 발자국에 자꾸 몸을 뒤집는다 여기까지라니 먼저 밀려온 물결이 땅 끝에 이를 때마다 부르지 않은 지난 일들이 나지막한 이름을 부른다 봄밤이 깊다 달마산 너머 열나흘 지나 보름 달빛이 능선을 향해 오를수록 산은 한편 눕고 혹은 일어나기를 거듭한다 잊었다는 듯이 잊지 않았다는 듯이 그래 때가 되면 이윽고 가야지 꽃숭어리째 붉은 동백이 긴 봄밤을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땅바닥에 뚝뚝 목을 내놓는다 미황사까지가 멀다..... 그때 대웅전에 들며 나는 왜 그 말을 떠올렸을까 미황사를 등뒤로 발길을 떼놓는다 내게 있어 아득히 잡히지 않는 먼길을 떠올린다 결국 알 수 없는 그곳까지가 멀다 - 미황사 / 박남준 미황사에 가고..

시읽는기쁨 2018.04.28

충북선 / 정용기

다음 생에는 충북선 기찻길 가까운 산골짜기에 볕바른 집을 마련해야지. 3, 8일에 서는 제천 장날이면 조치원 오송 충주를 지나오는 기차를 타고 터키석 반지를 낀 고운 여자랑 제천 역전시장을 가야지. 무쇠 솥에서 끓여내는 국밥을 사 먹고 돌아다니다가 또 출출해지면 수수부꾸미를 사 먹어야지. 태백산맥을 넘어온 가자미를 살까 어떤 할미의 깐 도라지를 살까 기웃거리다가 꽃봉오리 맺힌 야래향 화분 하나 사고 귀가 쫑긋한 강아지도 한 마리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지. 손잡고 창 너머로 지는 저녁 해를 보다가 삼탄역이나 달천역쯤에 내려서 집으로 와야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산그늘로 숨어들어야지. 소쩍새 소리 아련한 밤이면 둘이 나란히 엎드려 시집을 읽을까,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을까. 어쨌거나 다음 생에..

시읽는기쁨 2018.04.22

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 /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 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 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 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 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 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꽃이 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꽃이 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

시읽는기쁨 2018.04.14

봄 /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봄 / 반칠환 마술사 같은 요리사의 솜씨다. 한쪽에서는 팡팡거리며 팝콘도 터진다. 풍성한 자연의 식탁이 펼쳐지고, 우리는 그저 수저만 잡으면 된다. 연례행사로 이런 대접 받아왔으니 의례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기적이 아닌가. 바라보는 풍경에, 코를 간지리는 향기에, 가슴 콩당콩당 뛰어야 할 감사며 경외가 아닌가.

시읽는기쁨 2018.04.07

따뜻한 편지 / 이영춘

비는 오는데 우체국 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다 지쳐 아들아 이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 출금 전표도 대신 써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공직에 있을 때 제대로 했는지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듯 "비 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 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촌로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8.03.30

봄바람난 년들 / 권나현

보소! 자네도 들었는가? 기어이 아랫마을 매화년이 바람이 났다네 고추당초보다 매운 겨우살이를 잘 견딘다 싶더만 남녘에서 온 수상한 바람넘이 귓가에 속삭댕께 안 넘어갈 재주가 있당가? 아이고~ 말도 마소! 어디 매화년 뿐이것소 봄에 피는 꽃년들은 모조리 궁딩이를 들썩이는디 아랫마을은 난리가 났당께요 키만 삐쩍 큰 목련부터 대그빡 피도 안 마른 제비꽃 년들까정 난리도 아닌갑소 워매 워매~ 쩌그 진달래 년 주딩이 좀 보소 뻘겋게 루즈꺼정 칠했네 워째야 쓰까이~ 참말로 수상한 시절이여 여그 저그 온 천지가 난리도 아니구먼 그려~ 워쩔 수 없제 잡는다고 되것어 말린다고 되것어 암만 고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안 혀라 보소 시방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랑게 바람난 꽃년들 밴질밴질한 낯짝이라도 귀경할라믄 우리도 싸게 나가..

시읽는기쁨 2018.03.24

애첩 한고랑 / 김진완

- 느 아부지 요즘 첩이 생겼다 첩에 홀린 아버지 새벽이슬 밟는다 전철 두 번 갈아타고 30분을 걸어 만난 첩 연초록 치마 들춘다 - 히따야 요게 하는 재미! 주책이지! 침까지 흘린다 가족 소풍날, 아버지 상추 첩- 첩- 겹쳐 건넨다 아비 애첩은 손이 크고 인심도 푸져서 열 네 식구 배불리 먹이고도 성에 안 차 상추 한 보따리씩 안겨준다 - 요즘 느 아부지 팔자에 없는 첩 덕택으로 어깨에 힘 쫌 주니라 - 하모, 내 이래 뵈도 동네 삼아웃 쌈싸무기를 책임지고 있는 싸나이라! 그라니 어깨에 힘 안 주고 배기겠나! 봐라 상추가 얼매나 싱싱한지 펄펄 날라가라칸다 희안하지? 늙은 아비 혼을 빼먹어도 본처는 시샘이 안 나 첩 이름은 한고랑 변두리 주말농장 밭 한 고랑 - 애첩 한고랑 / 김진완 내일이 경칩이다. ..

시읽는기쁨 2018.03.05

쫄딱 망하기 / 백무산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그 말은 어제오늘 나온 말이 아니다 소설가 백신애가 1930년대에 쓴 글에 요즘 촌부들은 이악해서 도회지 사람들을 속여도 먹는다, 고 썼다 오랜 세월 빨아먹어도 그래도 아직 시골로 남아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시골로 살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반가운 사람들은 도시에서 망하고 왔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토목공사를 벌이지 않고 땅장사를 부업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아이가 시골에 이사 와서 동네방네 졸랑졸랑 자랑을 하고 다닌다 우리 아버지 서울에서 쫄딱 망했어요 망해서 즐거운 것은 아이와 땅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주가 쫄딱 망해서 생긴 것이 땅이다 땅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건 대체로 망한 거다 구름의 발길을 따라갔다면 그건 이미 사전에 망한 거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망하..

시읽는기쁨 2018.03.01

새해의 노래 / 김기림

역사의 복수 아직 끝나지 않았음인가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민족과 민족의 아우성 소리 어둔 밤 파도 앓는 소린가 별 무수히 무너짐인가? 높은 구름 사이에 애써 마음을 붙여 살리라 한들 저자에 사무치는 저 웅어림 닿지 않을까 보냐? 아름다운 꿈 지님은 언제고 무거운 짐이리라. 아름다운 꿈 버리지 못함은 분명 형벌보다 아픈 슬픔이리라. 이스라엘 헤매이던 2천년 꿈 속의 고향 시온은 오늘 돌아드는 발자국 소리로 소연(騷然)코나 꿈엔들 잊었으랴? 우리들의 시온도 통일과 자주와 민주 위에 세울 빛나는 조국. 우리들 낙엽 지는 한두 살쯤이야 휴지통에 던지는 꾸겨진 쪼각일 따름 사랑하는 나라의 테두리 새 연륜으로 한 겹 굳어지라. 새해와 희망은 몸부림치는 민족에게 주자. 새해와 자유와 행복은 괴로운 민족끼리 나누어 가..

시읽는기쁨 2018.02.17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

시읽는기쁨 2018.02.09

술 노래 / 예이츠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우리가 죽기 전에 알 것은 다만 이것뿐 나, 잔 들어 입 맞추고 나, 그대를 바로보며 한숨짓노라 - 술 노래 / 예이츠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s;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 A drinking song / W. B. Yeats 최근의 진화생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단순한 데서 온다고 한다. 행복은 생물의 본성을 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그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와인 한 잔 나누는 ..

시읽는기쁨 2018.02.04

찾습니다 / 이영혜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 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수사자 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면,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 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은 놈 먹다 버린 것도 좋아, 패거리로 몰려다니길 즐겨 하는, 웃음도 비열한 하이에나 말고 수천 권 뜯어먹은 지성인 척 턱수염 도도하게 으스대지만, 강자 앞에선 아첨의 목소리로 선한 초식동물인 척하는, 이중인격 비굴한 염소도 말고 아무데서나 혀 빼고 군침 흘려 대며, 할 소리 안 할 소리 쓸데없이 짖어 대거나 아무나 물어뜯는, 날카로운 야성의 송곳니는 유전자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인, 잡개는 더욱 말고 높은 하늘 향해 한 자세로 한 몸 꼿꼿이 세운 한 향기 한 ..

시읽는기쁨 2018.01.30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맨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인간 세상에 가난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다. 돈 많은 사람과 ..

시읽는기쁨 2018.01.24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화 "응" - 응 / 문정희 "응"이라는 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육감적인 생명의 언어다. 형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시선이 놀랍다. 그러고 보니 "응"을 쓸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카톡으로 대화할 때는 보통 "ㅇㅇ"이라 쓴다. 시인이 말하는 "응"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땅 위에서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화, "응".

시읽는기쁨 2018.01.19

오징어와 검복 / 백석

오징어는 오래동안 뼈가 없이 살았네. 오징어는 뼈가 없어 힘 못 쓰고 힘 못 써서 일 못 하고, 일 못 하여 헐벗고 굶주리였네. 헐벗고 굶주린 오징어는 생각했네- "남들에게 다 있는 뼈 내게는 왜 없을까?" 오징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로서는 그 까닭 알 수가 없어 이곳 저곳 찾아가 물어 보았네. 오징어는 맨 처음 농어 보고 물었네 "내게는 왜 뼈가 없나? 어찌하면 뼈를 얻나?" 농어가 그 말에 대답했네- "너는 세상 날 때부터 뼈가 없단다, 뼈 없이 그대로 살아가야지." 오징어는 농어의 말 믿기잖고 분하여, 그래서 이번에는 도미 보고 물었네 "내게는 왜 뼈가 없나? 어찌하면 뼈를 얻나?" 도미가 그 말에 대답했네- "너는 네가 못난 탓에 제 뼈까지 잃은 거지. 못난 것은 뼈 없이 살아가야지." 오징어..

시읽는기쁨 2018.01.13

송년회 / 황인숙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는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 (아마도) - 송년회 / 황인숙 다가올 날들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이 가장 젊다. 간명한 이치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나이 많이 먹었다는 타령을 한다. 지나온 과거를 껴입고 살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지금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그저 현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쉼 없이 변하는 중의 한 찰나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나이를 초월해서 삶을 ..

시읽는기쁨 2018.01.08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민지의 꽃 / 정희성 순백의 지순한 마음을 생각한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걸 다, 꽃이야, 라고 부르게 될까. '아이는 어른의 ..

시읽는기쁨 2018.01.03

괜찮아 /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시읽는기쁨 2017.12.27

맑은 웃음 / 공광규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만 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웬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 맑은 웃음 / 공광규 인간만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치명적인 자뻑이다. 아무리 지력이 발달한들 우리는 그저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니면 ..

시읽는기쁨 2017.12.23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시읽는기쁨 2017.12.17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아내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남편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

시읽는기쁨 2017.12.11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당신을 만나서 선생님이나 변호사, 검사나 약사, 의사나 화가 엄마나 아빠, 또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아주 오랜 꿈은 먼지가 되는 것 아무도 모르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폴폴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이러저리 떠다니다가 빗자루에 휙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 버려지기도 하는 또는 운 좋게 어느 집 방구석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십 년이고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나는 먼지가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어요 -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시골에 내려가 소식 끊고 지내는 동기가 셋이나 된다. 가끔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복잡한 인간관..

시읽는기쁨 2017.12.05

나목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나목 / 신경림 겨울나무는 영하 이삼십 도의 추위를 어떻게 견뎌낼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수액이 얼면 세포가 파괴될 텐데 얼지 않게 하는 어떤 작용이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부동액 성분이 방출되는지도 모르고, 나무 내..

시읽는기쁨 2017.11.29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려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

시읽는기쁨 2017.11.24

이게 뭐야? / 김사인

가슴이 철렁한다. 눈치챈 건 아닐까, 내가 깡통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언제부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차를 타고 모르는 내색을 아무도 않지.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아이가 물으면 집에 갈래, 울먹이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뜨거워지네. 이건 강아지 이건 나무 이건 칫솔 그렇게 일러줄까 허둥지둥 구파발이라고 우리나라라고 지구라고 하면 되나. 강아지가 뭐야, 지구가 뭐야, 다시 물으면? 무서워라 - 걱정 마, 좋은 데 가고 있어 - 다 와가, 가보면 알아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서 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

시읽는기쁨 2017.11.15

행복의 계단 / 이후재

창문을 넘어온 손수건 한 장 같은 아침 말간 햇살과의 만남이 첫 계단 작은 식탁에 앉아 아내의 손맛에 취해 날마다 감개무량하다면 두 번째 누군가의 초대로 길을 나서며 이웃의 온기 머금은 인사를 받는 것은 세 번째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포시 포옹하는 두 나비에게 배시시 웃음 던지면 그건 네 번째 아, 그러나 탱글탱글한 물상物象 앞에서 소유욕이 돋아나면 그것은 망령 - 행복의 계단 / 이후재 현대인은 행복의 파랑새를 쫓느라 발밑은 바라볼 줄은 모른다. 행복은 멀리, 높이 있지 않다. 내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에 행복으로 향하는 계단이 놓여 있다. 그저 한 발 내닫기면 하면 된다. 불평등한 세상이라지만 행복만은 평등하게 주어졌다. 돈이 많다고, 권세가 크다고 더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

시읽는기쁨 2017.11.08

밥 / 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숫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시읽는기쁨 2017.10.25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 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

시읽는기쁨 2017.10.21

맘도 두지 말고 / 주미경

빈 땅을 보면 노는 땅 아깝다 그러지 말고 딱정벌레 방 내주고 풀꽃이나 피우면서 한 해 놀게 두자 집도 짓지 말고 콩도 심지 말고 맘도 두지 말고 - 맘도 두지 말고 / 주미경 고향에서 어머니가 부치는 밭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힘에 부쳐서 모두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년에는 한 마지기 정도는 놀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노는 땅을 보면 혀를 찼던 어머니지만 이제는 어찌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신다. 빈 자리에 딱정벌레가 찾아오고 풀꽃이 사는 걸 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갈고 닦고 하는 것보다 가끔은 텅 빈 자리 그대로 두는 것도 필요하다. 이젠 그만 채워 넣어야 한다. 비닐을 걷어내고 비바람 그대로 맞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

시읽는기쁨 2017.10.14

몇 평생 다시 살으라네 / 이오덕

밤낮 침대에 누워 있자니 등뼈가 아파서 견딜 수 없다. 그래도 낮에는 정우가 안아서 잠시라도 앉아 있지만 밤에는 누워서 꼼짝 못 한다. 수건을 등뼈 양쪽 깔아 달라 해서 겨우 견디는데 이번에는 발뒤꿈치조차 아프다. 그래도 꼼짝 못 한다. 이건 아주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산 송장이다. 정말 밤마다 나는 관 속에 들어가 생매장되어 있다가 아침이면 살아난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또 죽었다가 살아나고 고것 참 재미있구나. 하루가 새 세상 새 한평생 앞으로 내가 몇 평생 살는지 고것 참 오래 살게 되었네. - 몇 평생 다시 살으라네 / 이오덕 2003년 8월 20일에 쓴 선생의 마지막 시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8월 20일 새벽에 선생은 숨을 거두었다. 8월 14일에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선생은 검사도..

시읽는기쁨 2017.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