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봄날은 간다 / 최금진

사슴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 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댓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키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키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

시읽는기쁨 2016.05.25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서른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한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처진 육신에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

시읽는기쁨 2016.05.17

굴뚝집 / 김명국

꿈이 있다면 비록 허름하더라도 내 집을 갖는 일이다 논도 한 서너 마지기쯤 있으면 좋겠다 텃밭도 조금 있고, 남들도 갖기 꺼리는 밭이라도 내 몫이 된다면 그곳에다 채소를 심으리라 경운기는 있어야겠지만 없어도 괜찮겠지 가끔씩은 멀리 가야 하므로, 헌 자전거가 하나 있어야겠다 지붕은 슬레이트든 기와든 상관없겠지만 초가집이면 더욱 좋겠다 손수 들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해두리니, 지붕을 잇는 가을날이면 눈부시리라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행복하리 일하는 날보다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더라도 근심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다 책도 읽고 시도 쓰고 답답하면 논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떠날 수 있다면,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겠다 옆집에서 넘어온 오이순을 탐내지 않았듯 눈이 많이..

시읽는기쁨 2016.05.13

별을 보면 / 이해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 별을 보면 내 마음 뜨겁게 가난해지네 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그 넓은 꽃밭에 앉아 영혼의 호흡 소리 음악을 듣네 기도는 물 마실 수록 가득찬 기쁨 내일을 약속하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꿇어앉으면 안으로 넘치는 강이 바다가 되네 길은 멀고 아득하여 피리 소린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별 뜨고 구름 가면 세월도 가네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주는 마음 훗날 별만이 아닌 나의 이야기 꽃으로 피게 살아서 오늘을 더 높이 내 불던 피리 찾아야겠네 - 별을 보면 / 이해인 이 시는 수녀님이 21세 때 썼다고 한다. 첫 서원을 하기 전인 예비수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첫 연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이라는 구절이 오래 기억되는 시다. 며칠 전 TV에 ..

시읽는기쁨 2016.05.07

왜요? /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 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 총총 - 왜요? / 천양희 저녁 무렵 밖에 나가면 머리 위에는 사자자리가 떠 있다. 서쪽으로는 오리온이 진다. 사자자리는 봄의 별자리다. 사자자리를 보고 하늘에도 봄이 온 걸 확인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

시읽는기쁨 2016.05.01

봄 펜팔 / 반칠환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

시읽는기쁨 2016.04.24

화인 / 도종환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

시읽는기쁨 2016.04.16

좌탈 /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 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저녁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 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 좌탈(坐脫) / 김사인 이렇게 저세상으로 갈 수는 없을까? 동물의 죽음에서 성자의 모습을 본다. 인간계에서는 생사를 깨친 선승만이 좌탈입망(坐脫立亡) 할 수 있다고 한다. 요사이는 웰빙보다 웰다잉(well-d..

시읽는기쁨 2016.04.10

오랑캐꽃 / 이용악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도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미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은 제비꽃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제비꽃보다 오랑캐꽃으로 많이 불렀다. 오랑캐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름이 그리 되니 괜히 밉상 취급을 받는다. 우리가 오랑캐라 불렀던 여진족도 마찬가지다. 내 이해와 어긋나니 오랑캐라 불릴 뿐 핍박을 받도록 태어난 건 아니다. 중국이 우리를 동이(東夷)라 부르며 오랑캐 취급을 ..

시읽는기쁨 2016.03.28

대주(對酒) /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 隨富隨貧且歡樂 不開口笑是痴人 - 對酒 / 白居易 첫 구는 에 나오는 예화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혜왕에게 대진인이 이 비유로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가 있는데 촉씨라하고,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는 만씨라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 땅을 다투며 수시로 전쟁을 하는데 전사자가 수만이라 합니다. 패배자를 쫓을 때는 십오 일 이후에나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우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달팽이 뿔 위의 다툼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하물며 재물의 많고 적음이야 티끌만도 못한 것이니 이 세상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시인은 술잔을 마주하고 권한다...

시읽는기쁨 2016.03.17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 이육사 어느 정치인이 "광야에 나가 죽어도 좋다"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광야란 무엇일까. 광야라고 하면 육사의 광야나 예수의 광야가 우선 떠오른다. 이 정도 우주적 스케일이거나 실존적 체험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쉬이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정치꾼..

시읽는기쁨 2016.03.09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동생의 설은 대답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사람 꼴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저 시대에도 그랬는데 요즘은 오죽할까. 염치를 모르는 인간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되었다. 영화 '동주'가 개봉되었다. 꼭 보러 가야겠다.

시읽는기쁨 2016.02.29

봄눈 온다 / 황인숙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雪)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나 봄비이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 - 봄눈 온다 / 황인숙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물질은 전체의 5%도 안 된다. 95%는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이다. 사람의 마음도 드러나 있지 않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안 보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실체는 그들이다. 눈에 보이고 감지되는 것은 존재의 극히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거대한 침묵 앞에서 그저 두려울 뿐.

시읽는기쁨 2016.02.23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비스듬히 / 정현종 한자의 '사람 인[人]'은 둘이서 기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있는 존재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필기체로 쓸 때는 한 획이 다른 획보다 짧다. 긴 쪽을 지탱해 주느라 허덕이는 모양새다. 세상 현실의 한 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기울어짐 없이 적당한 균형을 잡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쪽이 다른 쪽을 날카로운 창이 되어 찌르기도 한다.

시읽는기쁨 2016.02.18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고운 우리말 하나를 배웠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다. '물비늘'과 비슷하지만 '윤슬'이 좀 더 신비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

시읽는기쁨 2016.02.11

소스라치다 /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소스라치다 / 함민복 경안천에는 오리가 많다. 경안천을 걷다 보면 천변 풀섶에서 먹이를 먹는 오리를 만난다. 방해하지 않으려 피해서 걷지만 오리는 인기척만 느껴도 천 가운데로 도망간다. 미안하다. 어떤 때는 너무 예민한 그들이 야속할 때도 있다. 시에 나오는 뱀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그마한 곤충을 만나도 놀란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오히려 지상의 다른 생명들이다. 덩치가 산더미만 한 인간이 다가오는데 위협을 느끼지 않을 동물이 있을까. 역지사지해야 한다. 지상에서 인간보다 더 무서운 동물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 모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16.02.04

깡통 /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깡통 / ..

시읽는기쁨 2016.01.30

뻔디기 / 서정주

예수의 손발에 못을 박고 박히우듯이 그렇게라도 산다면야 오죽이야 좋으리오? 그렇지만 여기선 그 못도 그만 빼자는 것이야. 그러고는 반창고나 쬐끔씩 그 자리에 붙이고 뻔디기 니야카나 끌어 달라는 것이야. "뻐억, 뻐억, 뻔디기, 한봉지에 십원, 십원, 비 오는 날 뻔디기는 더욱이나 맛좋습네." 그것이나 겨우 끌어달라는 것이야. 그것도 우리한테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국민학교 6학년짜리 손자놈들에게까지 이어서 끌고 끌고 또 끌고 가 달라는 것이야. 우선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제에길! - 뻔디기 / 서정주 서정주 시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 시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정말 미당이 맞는지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나는 시 작품보다는 시인의 삶과 의식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미..

시읽는기쁨 2016.01.23

솔개 /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 솔개 / 김종길 아흔이 넘으신 김종길 시인은 여전히 시를 창작하고 계신다.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매우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며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가 없는 것 같다. '병 없이 앓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시인이 지향하는 시세계..

시읽는기쁨 2016.01.18

큰일이다 / 이상국

차 문을 열어두었더니 밤 사이에 뒷좌석과 앞좌석 사이에 거미가 집을 지었다 그러면 거미의 밥을 위하여 나비나 파리도 들어올 수 있게 계속 문을 열어두어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나와 미국의 무역센터 빌딩이 쓰러지는 걸 바라보며 어디서 많이 본 비디오 게임 같다거나 북조선이 핵실험을 해도 애써 눈도 꿈쩍하지 않는 이 나는 다르다 그러나 사무실 유리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이름 모를 새의 주검을 냇가에 묻어 주고 한나절 소주로 음복을 하면서도 시장바닥을 배로 밀고가는 사람의 돈통에 동전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또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이런 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언제부턴가 내가 모든 저들일지 모른다는 그런 되지도 않은 생각 때문에 같은 나와 다른 나는 날마다 싸운다 오늘도 시청 민원실에 들어가..

시읽는기쁨 2016.01.03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 / 이창숙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고만례 할머니는 어느 여름 저녁 모깃불 피운 멍석에 앉아 밤하늘에 솜솜 박힌 별을 세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대 그때, 머리에 커다란 짐을 인 아줌마가 사립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더래 저녁도 못 먹었다는 아줌마에게 있는 반찬에 남은 밥을 차려준 뒤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펴보던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놋양푼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지 뭐야 며칠 뒤 있을 할아버지 제사 때 떡과 나물과 전을 담으면 좋을 것 같았지 한 개에 삼백 원이라는 놋양푼을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문질러 보다 할머니는 은근하게 흥정을 했대 "세 개 살 테니 천 원에 주슈." 열무 비빔밥을 한입 가득 떠 넣던 놋양푼 아줌마는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고 거절했대 하지만 할머니는 조르고 또 졸..

시읽는기쁨 2015.12.29

버버리 곡꾼 / 김해자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덕지덕지 껴입은 품에서 서리서리 풀려나오는 구음이 조등을 적셨네 뜻은 알 길 없었지만 으어어 어으으 노래하는 동안은 떼 지어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 돌팔매도 멈췄네 어딜 보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팔뜨기 같은 눈에서 눈물 떨어지는 동안은 짚으로 둘둘 만 어린아이 풀무덤이 생기면 관도 없는 주검 곁 아주 살았네 으어어 버버버 토닥토닥 아기 재우는 듯 무덤가에 핀 고사리 삐비꽃 억새 철 따라 꽃무덤 장식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

시읽는기쁨 2015.12.23

큰 꽃 / 이문재

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 큰 꽃 / 이문재 지난가을 등산할 때 Y가 산길 따라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고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눈에 익은 나무가 아..

시읽는기쁨 2015.12.18

부음 / 함기석

첫눈이다 생선장수 트럭이 지나간 복대놀이터 골목 유모차에 내리는 흰 사과 꽃이다 아기가 살짝 맨발로 디디면 사과 향, 차고 흰 웃음이 간질간질 발가락을 타고 얼굴로 올라와 팔랑팔랑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소리 오늘밤 그 소리 뒤뜰에 차곡차곡 쌓인다 - 부음 / 함기석 첫눈을 죽음의 소식과 연관시킨 시인의 발상이 기발하다. 첫눈과 아기와 나비로 연상되던 이미지가 홀연히 죽음으로 치환된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의아해하다가 첫눈에 대한 환호나 부음에 놀라는 마음이 서로 멀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과연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첫눈처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득해진다. 가까운 분의 부음이..

시읽는기쁨 2015.12.13

백조 / 메리 올리버

넓은 물 가로질러 무언가 떠 오네- 가냘프고 섬세한 배, 흰 꽃들 가득한- 불가사의한 근육들로 움직이네 마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선물들을 메마른 기슭에 가져다주는 것이 감당하기 벅찬 행복인 것처럼. 이제 검은 눈을 돌리고, 구름 같은 날개를 가다듬고, 암회색 정교한 물갈퀴발을 끌며 오네. 곧 여기 닿겠지. 오, 나 어떻게 할까? 저 양귀비 빛깔 부리 내 손에 닿으면 시인 블레이크의 부인이 말했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이는 너무 자주 천국에 있어요. 물론! 천국으로 가는 길은 평범한 땅에 있지 않아. 상상력 속에 있지 네가 이 세상을 인지하는, 그리고 네가 세상을 찬미하는 몸짓들에. 오, 나 어떻게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저 흰 날개들 기슭에 닿으면. - 백조 / 메리 올리버 자..

시읽는기쁨 2015.12.08

엄마와 갓난아기 / 김은영

내 동생 갓난아기 똥을 싸면 소리 내어 운다 "우리 아기 소화 잘 됐네 어쩜 똥도 이뻐라" 엄마가 기저귀 갈고 엉덩이 다독여주면 아기는 방싯방싯 웃는다 중풍 걸린 외할머니 똥을 싸면 눈을 감고 씻긴다 "잡수신 것도 없는데 똥은 왜 이리 많이 싸요 냄새는 왜 이리 구려요" 엄마가 기저귀 갈고 물수건으로 닦아 드리면 가만히 눈물만 흘린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외할머니가 엄마였고 엄마는 갓난아기였다 - 엄마와 갓난아기 / 김은영 손주가 생기고 보니 오직 내리사랑뿐이란 걸 알겠다. 한 대 더 내려갔다고 자식 키울 때와도 비교할 수 없다. 기꺼이든 마지못해든 손주를 봐주는 건 손주가 이쁘기도 하지만 내 새끼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마음도 크다. 전부 아래로만 쏠리는 사랑이다. 위와 견주면 미안하고 송구하다. 우리는 부..

시읽는기쁨 2015.12.03

선택의 가능성 /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

시읽는기쁨 2015.11.29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린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시인의 대표작인 '직소포에 들다'를 시인이 직접 하는 말소리로 듣는다. 산문집 에 실린 글로, 제목은..

시읽는기쁨 2015.11.24

공기 / 이시영

공기를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편의점마다 공기가 동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 배출량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는 이제 툰드라나 아이슬란드 혹은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수입한 공기를 구입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부자 동네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다량이 공기를 매점해버렸기 때문에 서민들은 겨우 1리터의 공기 팩을 사기 위해 세븐일레븐과 GS25, 미니스톱을 향해 뛰었으나 품절되고 말았다. 병원 응급실마다 산소통이 반입되지 못해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며, 영유아들은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정부는 긴급대책으로 뉴질랜드로부터 대량의 공기선(船)이 들어온다고 발표했으나, 격분한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지금, 당장 마실 공기를 달라!"고 외쳤다. 경찰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진격..

시읽는기쁨 2015.11.17

별을 보며 /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별을 보며 / 이성선 얼마나 맑은 영혼이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고운 걸까. 부끄럽다. 별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마지막이 10년 전쯤 되던가.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유성우를 기다렸다. 여주 생활의 막바지일 때였다. 그때로부터 별을 잊으면서 내 삶도 타락되어 갔다. 별은 인간답게 살아가..

시읽는기쁨 2015.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