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2

공기 / 이시영

공기를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편의점마다 공기가 동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 배출량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는 이제 툰드라나 아이슬란드 혹은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수입한 공기를 구입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부자 동네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다량이 공기를 매점해버렸기 때문에 서민들은 겨우 1리터의 공기 팩을 사기 위해 세븐일레븐과 GS25, 미니스톱을 향해 뛰었으나 품절되고 말았다. 병원 응급실마다 산소통이 반입되지 못해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며, 영유아들은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정부는 긴급대책으로 뉴질랜드로부터 대량의 공기선(船)이 들어온다고 발표했으나, 격분한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지금, 당장 마실 공기를 달라!"고 외쳤다. 경찰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진격..

시읽는기쁨 2015.11.17

별을 보며 /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별을 보며 / 이성선 얼마나 맑은 영혼이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고운 걸까. 부끄럽다. 별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마지막이 10년 전쯤 되던가.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유성우를 기다렸다. 여주 생활의 막바지일 때였다. 그때로부터 별을 잊으면서 내 삶도 타락되어 갔다. 별은 인간답게 살아가..

시읽는기쁨 2015.11.10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난 올바르고 넌 글렀어, 이런 생각 하는 건 나무라고 싶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그런데 자신의 이념을 남에게 강요하면 그건 폭력이 되는 거야. 네가 옳다..

시읽는기쁨 2015.11.03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꿈뻑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가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소 / 김기택 소나무는 한민족의 상징이다.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무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데 소만큼 소중한 가축도 없다. 소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소'나무와 '소'가 무슨 연관이 없을까, 고민..

시읽는기쁨 2015.10.26

배움을 찬양함 / 브레히트

배워라 단순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시대가 왔다 너무 늦는 법은 없는 것이다! 배워라 가나다라를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겠지만 우선 배워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일랑 하지 말고 시작해라!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배워라 여인숙에 사는 사람들이여 배워라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여 배워라 부엌의 여자들이여 배워라 60세의 여인이여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학교를 찾아라 집 없는 사람들이여 지식을 손에 넣어라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여 굶주린 사람들이여 책을 잡아라 손에 그것은 무기의 하나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동지여 질문하라 망설이지 말고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음미해 보라!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앎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감정서를 검..

시읽는기쁨 2015.10.19

왕대폿집 / 구중서

수원화성 화홍문 연못가 왕대폿집 벽에 걸린 주전자가 모과처럼 우그러져 막걸리 젖통을 만진 손들을 알만하다 안주도 안 시키고 막걸리만 들이켜는 넝마주의 단골손님 오늘은 안 보이네 그나마 막걸리 값도 마련이 못 되었나 대폿집 주인장이 문밖을 내다본다 리어카 세워놓고 딴 데 보는 단골손님 주인이 불러들이네 공으로 마시라고 - 왕대폿집 / 구중서 10여 년 전 화성에 갔을 때 찍어둔 왕대폿집 사진이 있다. 거꾸로 달린 간판이 특이해서 한참 들여다봤는데 바로 이 시조에 등장하는 왕대폿집이다. 여기 들리는 사람들은 거꾸로 된 간판이 바로 보일 때까지 마셨다나 어쨌다나, 유명한 집인 줄 그때 알았더라면 나도 한 번 들어가 봤을 텐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주인장 인심도 그대론지, 언제 화성에 다시 가봐야겠다.

시읽는기쁨 2015.10.12

솔깃 / 최재경

읍내 다방이 신장개업을 하면서 마담도 새로 오고 배달하는 아가씨도 둘이나 따라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무 개가 넘는 마을로 순식간에 번졌다 모두 솔깃하였지만, 그 놈의 체면 때문에 내놓고 좋아라 하는 눈치는 뒤로 꿍쳤다 스피커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게 뽕짝으로 조지는 관광버스 막춤 음악이 흘러나왔다 화환인지 꽃다발인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위아래를 흔들려 차를 날랐다 젊은 것들은 가겟방에서 노닥거리며 해가 식기를 기다렸고, 나잇살이나 있는 이들은 둘러앉아 내가 누구이며 어디 사는 거시기고 머시기 타령이다 뻔한 뻥튀기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들은 착 달라붙어 시키지도 않은 비싼 쌍화차나 칡즙을 저희들 맘대로 시켜먹었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하나 둘씩 일어선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다보..

시읽는기쁨 2015.10.05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쫄딱 / 이상국 포터 트럭에 싣고 온 짐을 컨테이너에 넣을 때 마음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저 집은 망해서 온 모양이야." 나도 경험한 일이다. 사람들의 연민 어린 눈빛이 그런 거였구나. 돈 많다고 거들먹거려서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먹물 티도 마찬가지다. 도..

시읽는기쁨 2015.09.24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우리는 너무 거창한 걸 좇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작은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행복을 찾아 멀리 나가보..

시읽는기쁨 2015.09.18

실언 / 고증식

고향에서 이발로 먹고 사는 깎새 형이 들려준 우스개 한 토막 바야흐로 설 단대목에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바쁜데 엊그제 새로 들인 머리나 감기는 시다 녀석 하나가 세상 둘도 없는 뺀질이더라고 그 녀석 그날따라 별나게 더 뺀질거려 보다 못한 깎새 형 버럭 한소리 질렀다는데 - 야 이놈 자식아, 그만 좀 뺀질거리고 얼릉 여 와 손님 대가리나 감겨! 순간, 길게 목 빼고 엎드렸던 그 손님 문제의 대가리 번쩍 치켜들고 한참이나 뻥하게 쳐다보더라고 - 실언 / 고증식 당황했을 깎새 형과 손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시다 녀석은 얼마나 킬킬거렸을 것인가. 악의가 아닌 줄 알기에 실소 뒤에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 같다. 아마 유머 있는 손님이라면 "야, 대가리 좀 잘 감겨봐." 정도의 대꾸는 있지 않..

시읽는기쁨 2015.09.05

소를 웃긴 꽃 / 윤희상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것이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 소를 웃긴 꽃 / 윤희상 시를 처음 읽는 순간 뭔가 번쩍 하고 뇌리를 친다. 그러면서 느낌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저 얼떨떨하다. 좋은 시는 대부분 그렇다. 이 시가 그랬다.

시읽는기쁨 2015.08.29

박조요(撲棗謠) / 이달

이웃집 꼬마가 와서 대추를 따네 늙은이가 문을 나와 꼬마를 내쫓네 꼬마가 홱 돌아서며 늙은이에게 하는 말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면서 - 대추 따기를 노래함 / 이달 隣家小兒來撲棗 老翁出門驅小兒 小兒還向老翁道 不及明年棗熟時 - 撲棗謠 / 李達(1539~1609) 버릇없는 꼬마한테 한 수 가르침을 받는 노인이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시 내용이 역시 이달(李達)답다. 허균이나 허난설헌이 나올 때마다 꼭 등장하는 시인 이달이다. 늙은이의 입장이 되어 이 시 속으로 들어가 보면, 꼬마의 한 마디가 번쩍하는 번갯불이 되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의 행태도 저 노인과 다르지 않음이다. 내 것, 네 것을 가르는 게 본래 부질없는 짓이렷다.

시읽는기쁨 2015.07.29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었느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

시읽는기쁨 2015.07.23

익어 떨어질 때까지 / 정현종

기다린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만사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될성부른가) 노래든 사귐이든, 무슨 작은 발성(發聲)이라도 때가 올 때까지, (게으름 아닌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 익어 떨어질 때까지 / 정현종 늘그막이 되어 좋은 점은 느긋이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다. 뚜렷한 목표가 없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과실나무가 있는 것은 꼭 익은 과실을 얻기 위함은 아니다. 잎도 좋고, 꽃도 좋고, 새파랗게 달리는 열매도 좋다. 그리고 달콤한 맛도 보게 될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다. 그것이 제대로 익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5.07.17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정말 그랬다. 그 시절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었다. 초가지붕 위로 달이 떠오르고, 한쪽에는 모깃불 연기가 매캐한 가운데 멍석 위에 상이 차려졌다. 처마에 남포등이 흔들거렸지만 달빛이 오히려 환했다. 둥근 상 둘에 아홉 명이 둘러앉았다. 드문드문 말소리,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 수저를 놓고 멍석에 누우면 이만큼 뜬 달이 가득 들어왔다. 외양간의 소도 고단한 몸을 쉬며 고개를 딸랑거렸다. 지금은 마당 없는..

시읽는기쁨 2015.07.09

야호! / 이종문

내 방금 낮 꿈에서 작은 청개구리 되어 연잎에 폴짝 뛰어 팔을 베고 누웠더니 바람도 살랑 바람에 호사도 좋을시고, 후두두두 다다다다 소낙비 냅다 때려 얼씨구 절씨구나 어절씨구 춤을 추다, 연잎이 왕창 꺾어져 기절초풍했죠, 야호! - 야호! / 이종문 요즈음은 우째 꿈조차 사납고 지저분한지 모르겠다. 나이 들수록 속에는 쓰레기로 가득 차는가 보다. 각박한 현실에서 예쁜 꿈으로나마 위로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시인처럼 작은 청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누웠다가 냅다 때리는 소낙비 맞으며 어절씨구 춤을 춘다면 얼마나 신나랴. 절로 "야호"가 나올 것 같다. 오래전이지만 신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맨몸으로 하늘을 나는 꿈이었다. 마음이 조종하는대로 내 몸은 창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

시읽는기쁨 2015.06.29

나무가 할 일 / 박노해

바람이 거셀수록 나무가 할 일은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 키가 커질수록 나무가 할 일은 가지를 떨궈내리는 것 거목이 돼갈수록 나무가 할 일은 제 안을 비워 영원을 품어가는 것 그리하여 나무가 할 일은 단단한 씨앗 속에 자신을 담아 푸른 산맥으로 돌아가는 것 - 나무가 할 일 / 박노해 '나무' 대신에 '나'를 대입하여 읽는다.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도, 가지를 떨궈내리는 일도, 여전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인간이 나무처럼 성장한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헛말이구나. '한 일'은 하나도 없고 '할 일'만 남아 있을 뿐, 그것도 아득한 약속으로만.....

시읽는기쁨 2015.06.22

이소 / 송진권

오빠랑 언니들도 아까부터 지달리구 있는디 뭘 그르케 자꾸 꾸물대는 겨 그르케 자꾸 꾸무럭거리믄 떼 놓고 갈 텡께 알아서 햐 어여어여 날 새기 전에 가야 하니께 싸기싸기 내려오니라 비얌이랑 쪽제비가 일어나기 전에 어여 물로 가야 하는디 당최 쫑마리가 저런다니께 엄마두 이제 몰러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햐 엄마 원앙이가 언니들 앞에 서자 일곱 마리 원앙이가 졸래졸래 따라간다 멈칫대던 막내가 그때사 느티나무 고목 둥치에서 뛰어내린다 엄마 같이 가 하냥 가자니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둥구나무 딱따구리가 뚫어 놓은 원앙이네 둥지 - 이소 / 송진권 원앙이 가족의 모습이 정겹다. 삶의 기본에서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차이가 없다. 동물이 새끼를 돌보고 기르는 지극함은 인간에 못지않다. 다른 점이라면 새끼가 성장하..

시읽는기쁨 2015.06.13

결혼 기차 / 문정희

어떤 여행도 종점이 있지만 이 여행에는 종점이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 내려야 할 때는 묶인 발목 중에 한쪽을 자르고 내려야 한다 오, 결혼은 중요해 그러나 인생은 더 중요해 결혼이 인생을 흔든다면 나는 결혼을 버리겠어 묶인 다리 한쪽을 자르고 단호하게 뛰어내린 사람도 이내 한쪽 다리로 서서 기차에 두고 온 발목 하나가 서늘히 제 몸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서둘러 다음 기차를 또 타기도 한다 때때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만 이번 역에서 내릴까 말까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선반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을 쳐다보다가 어느덧 노을 속을 무슨 장엄한 터널을 통과하는 종점이 없어 가장 편안한 이 기차에 승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 결혼 기차 / 문정희 이기적인 욕심을 떼어놓고..

시읽는기쁨 2015.06.07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윤동주는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청년이 제국의 수도..

시읽는기쁨 2015.06.02

깨끗한 빗자루 / 박남준

세상의 묵은 때를 적시며 벗겨주려고 초롱초롱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 - 깨끗한 빗자루 / 박남준 빗줄기를 빗자루와 연관시킨 시인의 눈이 색다르고 신선하다. 깨끗한 세상을 바라는 염원이 이런 눈을 트이게 한 것이리라. 도로 옆 텃밭을 가꾸는 분이 오토바이로 개울물을 실어 나르는 걸 보았다. 날이 가물어 큰일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맑고 깨끗한 빗자루를 한나절이라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시읽는기쁨 2015.05.26

오월의 유혹 / 김용호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쳐오르는 가슴을 네게 맡기고, 사양에 서면 풍겨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히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깃들어 감미롭게 핀 황홀한 오월 - 오월의 유혹 / 김용호 내가 다닐 때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표지를 열면 바로 이 시가 나왔다. 시 단원에 나오는 시가 아니고 교과서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오월의 유혹'이 실려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설명하던 말과 동작까지 선명히 떠오른다. 언젠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이 시가 기억나느냐고 물으니 하나같이 모른다고 했다. 별난 걸 다 기억한다고 오해까지 받았다. 그래서 다른 데서 본 걸 내가 착각하고 있..

시읽는기쁨 2015.05.19

들어간 사람들 / 이진명

외할머니 일흔일곱에 들어갔다 한 해 뒤 어머니 마흔일곱에 들어갔다 두 사람 다 깊은 밤을 타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1년씩 1년 반씩 병고에 시달렸지만 들어갈 때는 병고도 씻은 듯이 놓았다 두 사람 들어간 문은 좁은 문은 아닌 것 같다 일흔일곱도 받고 마흔일곱도 받은 걸 보면 좁은 문은 아니나 옷보따리 하나 끼지 못하게 한 걸 보면 엄격한 문인 것 같다 두 사람 거기로 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거기 법이 그런가 보았다 하긴 외할머니 어머니 여기서도 법도 잘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들어왔으면 문 꼬옥 닫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 들어간 사람들 / 이진명 이쪽에서 보면 들어갔지만, 저쪽에서 보면 들어왔다다. 이쪽에서 말할 때는 돌아가셨지만, 저쪽에서 말할 때는 돌아오셨다가 된다. 죽음이 별스러운 게..

시읽는기쁨 2015.05.13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 박두진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 뿜는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도 못막는 우리들의 피대열을 흩을 수가 없다.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민족, 내가 사는 조국이여 우리들의 젊음들 불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내린 악으로 불순으로 죄악으로 숨어내린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의 썩은 것을 씻쳐 내는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사뤄 젊음이여! 정한 ..

시읽는기쁨 2015.04.20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 신현림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려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시읽는기쁨 2015.04.12

동네 사람 먼 데 사람 / 이안

뒷산 두릅밭 지나가면서 어린 순 몇 개는 살려두었다 내년 봄이 가까운 동네 사람들 뒷산 두릅밭 지나가면서 우둠지까지 싹뚝싹뚝 잘라서 갔다 내년 봄이 아득한 먼 데 사람들 - 동네 사람 먼 데 사람 / 이안 지구 마을에서 우리는 동네 사람으로 사는 걸까, 먼 데 사람으로 사는 걸까. 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을 외면하는 바보들....

시읽는기쁨 2015.04.06

망악(望嶽) / 두보

태산의 모습 어떠한가 제나라에서 노나라까지 푸르름 끝이 없어라 하늘은 이곳에 온갖 신비함을 모았고 산빛과 그림자는 밤과 새벽처럼 갈린다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 크게 뜨고 돌아가는 새를 바라본다 언젠가 반드시 저 꼭대기에 올라 소소한 뭇 산을 한번 굽어보리라 垈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造化鐘紳秀 陰陽割昏曉 탕胸生曾雲 決자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 望嶽 / 杜甫 3년 전에 중국 태산(泰山)에 올랐다. 7천 개가 넘는 계단을 걸어 남천문에 닿았고, 일출을 보기 위해 정상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문을 여니 호텔 복도는 새우잠을 자는 중국인들로 걸어가기조차 힘들었다. 호텔 밖에는 더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누워 있는 사람들 ..

시읽는기쁨 2015.03.30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밥그릇 경전 / 이덕규 한 학승이 조주(趙州, 778~897) 선사를 찾아왔다. "저는 공부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요." 이에 선사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시읽는기쁨 2015.03.25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아배 생각 / 안상학 통지표를 들고 아버지 계신 사무실로 달려갔다.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건물 뒤편 독립된 방에 아버지..

시읽는기쁨 201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