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끼니 / 고영민

1 병실에 누운 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가 그날 아침엔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너무 반가워 나는 뛰어가 미음을 가져갔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냥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아버지는 밥을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2 우리는 원래와 달리 난폭해진다 때로는 치사해진다 하찮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가진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겨울,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노숙자가 자고 있던 동료를 흔들어 깨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먹어둬!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잖아 - 끼니 / 고영민 얼마 전 모임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보았다는 이가 여럿 있었다. 정신력이 강하면서 존경을 받던 분이..

시읽는기쁨 2017.09.30

강냉이 / 권정생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다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통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 강냉이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생이 쓰신 여러 편의 동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라는 동시집이다. 2011년이었다. 이 시는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

시읽는기쁨 2017.09.22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와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으로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 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시읽는기쁨 2017.09.17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

시읽는기쁨 2017.09.09

석유장수 / 심호택

6학년 때 추운 밤 과외공부 하는데 교실 뒤켠에서 무슨 소리 들립니다. 석유장수 기름 따르는 소리 비슷합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시며 누구여? 변소 가기 겁난 친구 일 보자고 대둣병에 집어넣은 것이 그만 통통해져 빠지지를 않습니다. 큰일입니다. 다가오신 선생님께 엉거주춤 알밤 두어 대 얻어터지니 그제서야 비로소 빠졌습니다. - 석유장수 / 심호택 빙그레 미소 짓다가 이내 옛날 추억 속에 잠긴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그때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입시 경쟁이 지금보다 더했다. 중학교가 둘밖에 없던 작은 읍에도 학교가 성적으로 나누어졌다.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가는 A 중학교, 그리고 미달이 되기도 하는 B 중학교가 있었다. 똥통이라 불린 B 중학교는 장학금이 있어서 공부는 ..

시읽는기쁨 2017.08.31

산다 / 다나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 깊게 거부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딘가에서 병사가 상처 입는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시읽는기쁨 2017.08.25

선풍기 / 이정록

우리 집 선풍기는 열한 살 나랑 동갑내기, 땀 뻘뻘 일을 해도 "어이구 고물! 아이구 저 늙다리!" 구박받네 섧 고 서 러 워 도리질하던 선풍기 갑자기 고개를 끄덕끄덕 - 선풍기 / 이정록 선풍기 하나가 고장 나서 남은 선풍기가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여름 시작하면서 청소한다고 선풍기를 뜯었다가 부주의로 날개를 조이는 플라스틱 캡이 부러졌다. 간단한 부품 하나가 없어 멀쩡한 선풍기가 방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혹시 길거리에 버려진 선풍기가 없나 열심히 살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골목마다 전파사가 있어서 무엇이든 간단히 수리할 수 있었다. 요사이는 대기업 제품이 아니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고쳐서 쓴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다. 글자가 이루는..

시읽는기쁨 2017.08.17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 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둘.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주..

시읽는기쁨 2017.08.12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 신경림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시읽는기쁨 2017.08.05

담박 / 정약용

담박을 즐기니 한 가지 일도 없어 타향의 살림살이 외롭지만은 않네 손님 오면 꽃 아래로 시권을 가져오고 중 떠난 침상 곁엔 염주가 남아 있지 한낮이면 채마밭에 벌이 한창 붕붕대고 따순 바람 보리 이삭 꿩이 서로 부르누나 우연히 다리 위서 이웃 영감 만나 조각배 함께 타고 진탕 마실 약속했네 - 담박 / 정약용 淡泊爲歡一事無 異鄕生理未全孤 客來花下携詩券 僧去牀間落念珠 菜莢日高蜂正沸 麥芒風煖雉相呼 偶然橋上逢隣수 約共扁舟倒百壺 - 淡泊 / 丁若鏞 '담박(淡泊)'이란 말이 좋다. '물 맑을 담(淡)'에 '머무를 박(泊)'이다. '담백함에 머무르다'는 뜻이겠다. 욕심 없고 순박한 마음, 무위(無爲)의 마음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함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꽃 아래서..

시읽는기쁨 2017.07.28

잡초 비빔밥 / 고진하

흔한 것이 귀하다. 그대들이 잡초라고 깔보는 풀들을 뜯어 오늘도 풋풋한 자연의 성찬을 즐겼느니.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숱한 맛집을 순례하듯 찾아다니지만, 나는 논 밭두렁이나 길가에 핀 흔하디흔한 풀들을 뜯어 거룩한 한 끼 식사를 해결했느니. 신이 값없는 선물로 준 풀들을 뜯어 밥에 비벼 꼭꼭 씹어 먹었느니.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이 개망초 민들레 질경이 돌미나리 쇠비름 토끼풀 돌콩 왕고들빼기 우슬초 비름나물 등 그 흔한 맛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너무 흔해서 사람들 발에 마구 짓밟힌 초록의 혼들, 하지만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나니, 그렇게 흔들리는 풋풋한 것들을 내 몸에 모시며 나 또한 싱싱한 초록으로 지구 위에 나부끼나니. -..

시읽는기쁨 2017.07.21

은현리 천문학교 / 정일근

내 사는 은현리 산골에 별을 보러 가는 천문학교가 있다. 은현리 천문학교에서 나는 별반 담임선생님. 가난한 우리 반 교실에는 천체망원경이나 천리경은 없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부터 칠판을 깨끗이 닦아놓는 착한 하늘이 있고, 일찍 등교해서 교실 유리창을 닦는 예쁜 초저녁별이 있다. 덜커덩 덜커덩 은하열차를 타고 제 별자리를 찾아오는 북두칠성 같은 덩치 큰 별들이 있고, 먼 광년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숨을 헐떡이는 별도 있다. 오래 전 나도 별과 같은 학생이었다. 그 때의 우리들처럼 별들도 여간 말썽꾸러기가 아니다. 내가 출석을 부르는 사이 슬쩍 자리를 바꾸어 앉는 개구쟁이별이 있고, 시간시간 붉은 옷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멋쟁이별도 있다. 그러나 나는 별들을 야단치지 않는다. 혹시 별이 울어 버릴까 두..

시읽는기쁨 2017.07.15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문익환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산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 마음이었거든 한 마음..

시읽는기쁨 2017.07.08

채련곡 / 허난설헌

秋淨長湖碧玉流 蓮花深處繫蘭舟 逢郎隔水投蓮子 或被人知半日羞 - 採蓮曲 / 許蘭雪軒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우거진 곳에 목란배를 매었네 물 건너 님을 만나 연밥 따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봤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 - 채련곡 / 허난설헌 허난설헌이 지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요염하다. 중국풍의 느낌도 난다. 여인의 연정과 수줍음이 연꽃을 소재로 잘 그려져 있다. 때는 가을, 연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연밥이 여무는 호수다. 호수에 배를 띄운 여인은 물 건너 사랑하는 낭군을 보고는 연꽃 열매를 따서 던진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조선 시대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나절이나 부끄러웠을까? 아마 몰래 배 위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더 어울릴..

시읽는기쁨 2017.07.01

단추를 채우며 / 이정록

남자 옷은 오른쪽 옷섶에 단추가 달려 있다 여자 옷은 반대로 오른쪽 옷섶에 단춧구멍이 파여 있다 누구는 좌우뇌의 발달 차이 때문이라 했다 누구는 하인이 채워주기 쉽도록 귀부인의 단추가 옮겨갔다고 했다 모래밭에서 단추 찾듯 동서양 복식발달사를 뒤적였다 동서고금의 민화와 동굴벽화도 설펴보았다 뒤죽박죽이었다 칼 찬 병사와 말달리는 전사를 보고야 알았다 젖 물리는 여인네의 눈물 젖은 단추를 만나고야 무릎을 쳤다 남자는 왼 허리에 찬 긴 칼을 재빨리 뽑기 위해, 여자는 보채는 아이에게 젖 물리기 쉽도록 단추를 매단 것이었다 내 수컷이 단추처럼 작아졌다 내 단춧구멍은 죽임의 묘혈, 여자 것은 살림의 숨구멍이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단추, 너무 커서 테두리만 산마루에 걸쳤다 왼쪽 옷섶에 낮달이 떠 있다 아득히 멀지만,..

시읽는기쁨 2017.06.24

나쁜 엄마 / 고현혜

이런 엄마는 나쁜 엄마입니다 뭐든지 맛있다고 하면서 찬밥이나 쉰밥만 드시는 옷이 많다고 하면서 남편의 낡은 옷까지 꿰매 입는 아픈 데가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밤새 끙끙 앓는 엄마 한평생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 않고 왠지 죄의식을 느끼며 낮은 신분으로 살아가는 엄마 자신은 정말 행복하다고 하면서 딸에게 자신의 고통이 전염될까 봐 돌 같이 거친 손과 가죽처럼 굳은 발을 감추는 엄마 이런 엄마는 정말 나쁜 엄마입니다 자식을 위해 모두 헌신하고 더 줄 게 없어 자식에게 짐이 될까 봐 어느날 갑자기 눈을 뜬 채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따뜻한 밥을 풀 때마다 고운 중년 부인의 옷을 볼 때마다 뒷뜰에 날아오는 새를 "그랜마"라고 부르는 아이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식 가슴에 못 박히게 하..

시읽는기쁨 2017.06.18

굴뚝 / 윤동주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 / 윤동주 동생은 새집을 지으며 군불을 때는 방을 만들었다. 한쪽 벽으로 아궁이와 굴뚝이 있다. 어머니를 위해서다. 마당에는 어머니가 해 놓으신 나뭇더미가 있다. 오래된 나무는 한쪽에서 삭아간다. 이젠 사라진 풍경이 되었지만 취사와 난방을 전부 땔감으로 하던 시절에는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뒷산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고, 어른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먼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민둥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식 주택에서..

시읽는기쁨 2017.06.12

운명 / 도종환

당신 거기서도 보이십니까 산산조각난 당신의 운명을 넘겨받아 치열한 희망으로 바꿔온 그 순간을 순간의 발자욱들이 보이십니까 당신 거기서도 들리십니까 송곳에 찔린 듯 아프던 통증의 날들 그 하루하루를 간절함으로 바꾸며 이겨낸 승리 수만마리 새 떼들 날아오르는 날갯짓 같은 환호와 함성 들리십니까 당신이 이겼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당신 때문에 오래 아팠습니다 당신 떠나신 뒤로 야만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어디에도 담아둘 수 없는 슬픔 어디에도 불지를 수 없는 분노 촛농처럼 살에 떨어지는 뜨거운 아픔을 노여움 대신 열망으로 혐오 대신 절박함으로 바꾸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지는 오월이 오면 나뭇잎처럼 떨리며 이면을 드러내는 상처 우리도 벼랑 끝에 우리 운명을 세워두고 했다는 걸..

시읽는기쁨 2017.06.04

붉은 마침표 / 이정록

그래, 잘 견디고 있다 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 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 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 그쪽 노을빛 우듬지와 이쪽 소나무의 햇살 꼭지를 길게 이으면 하늘이 된다 그 하늘길로, 내 마음 뜨거운 덩어리가 되어 타고 넘는다 송진으로 봉한 맷돌편지는 석양만이 풀어 읽으리라 아느냐? 단 한 줄의 문장, 수평선의 붉은 떨림을 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것을 - 붉은 마침표 / 이정록 울산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 서쪽 낮은 산에 걸린 붉은 해를 마주보며 달렸다. 고속도로는 석양빛을 반사하며 붉게 빛났다. 마치 레드 카펫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석양 풍경은 언제나 비장하고 장중하다. 석양을 '붉은 마침표'로 본 시인의 시각이 새롭다. 태양..

시읽는기쁨 2017.05.29

선우사 /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선우사(膳..

시읽는기쁨 2017.05.22

자연이 들려주는 말 / 로퍼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 자연이 들려주는 말 / 척 로퍼 I Listen I Listen to the trees, and they say: "Stand tall and yield. Be tolerant and flexible."... I Listen to th..

시읽는기쁨 2017.05.14

서산 마애불 / 박경임

삼국시대부터 바위 속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부처님 아직도 나오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 뒤쪽은 못 나왔는데 그래도 좋은지 웃고 있다 - 서산 마애불 / 박경임 이학도 기질을 못 벗었는지 계산 본능이 살아난다. 서산 부처님이 1,400년 동안 2cm 정도 나오는 정도라면, 인간의 일생이면 1mm 쯤에 해당한다. 인생이 짧다지만 허투루 여길 크기가 아니다. 진력하면 바위를 1mm 밀어낼 수 있는 삶이다. 그만큼이라도 진보하면 생의 의미는 있다. 그런 힘으로 살아야겠다.

시읽는기쁨 2017.05.08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대며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사..

시읽는기쁨 2017.04.30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걸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종교 의식에 빠졌을 때와..

시읽는기쁨 2017.04.24

돌아가는 꽃 / 도종환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 돌아가는 꽃 / 도종환 부활절인 오늘은 세월호 3주기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세월호를 기억하며 드리는 미사에서 옆자리 아주머니는 세월호 영상을 보며 하염없이 흐느끼신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어떠한지 나는 잘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먹먹할 뿐이다. 경안천에 나가 꽃을 보며 이 시를 읊조린다.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 언제나 잠시 //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 저녁 햇살로 돌아가리". 생명 사이의 인연이 그런 것이리, 찡 해진 가슴으로 뿌연 봄하늘을 바라본다.

시읽는기쁨 2017.04.16

위층 아이들 / 이중현

쿵쿵쿵 저건 형 뛰는 소리 콩콩콩 이건 동생 뛰는 소리 아빠, 위층에 전화해요 천장 무너지겠어요 그냥 둬라 너도 어릴 때 저랬거든 이제 그 빚 갚는 거다 - 위층 아이들 / 이중현 손주 둘이 모이면 통제 불능이 된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날이면 이 방 저 방으로 쿵쿵 콩콩이다. 며칠 전에는 아래층에서 조용히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하나는 제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까지도 위층 아이들 때문에 여러 차례 인터폰을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훨씬 덜해졌다. 이젠 반대로 내가 받을 차례가 되었다. 사는 게 빚을 갚는 일이다. 부모한테 잘못한 건 자식을 통해 갚는다. 사는 건 빚을 지는 일이다. 지금도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는 빚을 지고 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

시읽는기쁨 2017.04.09

봄의 서곡 / 노천명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옷들을 받아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포도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 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 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 분홍 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 봄의 서곡 / 노천명 시절이 하 수상하니 봄이 와도 봄을 실감하지 못한다. 세월호는 3년만에 뭍으로 돌아왔고,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은 감방에 들어갔다. 묵직한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다. 곧 대통령 선거가 있지만 누가 되든 선거 후가 다시 걱정이..

시읽는기쁨 2017.04.01

나도 보험에 들었다 / 이상국

좌회전 금지 구역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택시기사가 핏대를 세우며 덤벼 들었지만 나도 보험에 들었다 문짝이 찌그러진 택시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조수석에 탔다가 이마를 다친 남자에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이나 죽음이 극적일수록 보험금은 높아질 것이고 아내는 기왕이면 좀더 큰 걸 들지 않은 걸 후회하며 그걸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구를 바꾸며 이 세계와 연대할 것이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 나도 보험에 들었다/ 이상국 아내가 공기 청정기를 사 왔다.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휴대폰으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는 일이 아내의 일과가 된 지 오래였다. 빨간색이 파란색으로 바뀌는 걸 보..

시읽는기쁨 2017.03.25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칠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것들 때문에 - 눈에 넣어도 ..

시읽는기쁨 2017.03.18

아름다운 구멍 / 장정일

카파도키아에서 사흘을 보내고 이스탄불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공항은 밤새 내린 폭설로 마비되었다. 대합실 통유리 밖으로 제설차가 활주로를 새로 닦는 모습을 구경하며, 폭설로 지연된 비행기 운행이 내 인생에 선사하게 될 뜻밖의 구멍을 상상했다. 뚱뚱한 스페인 아주머니들은 단체 여행을 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흑인 청년은 껌을 씹고 피부색이 갖가지인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말로 동맹을 맺는다. (카파도키아에서 여행 중에 몇 번이나 마주친 네 명의 한국 남자 대학생들, 이들은 영어로만 대화한다.) 몇 시간 만에 눈을 치우고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폭설을 감안하면 정상 운행이었다. 창밖으로 흘낏 본 남겨진 비행기들. 비스킷과 오렌지 주스를 사양하고 그보다 더 달콤한 꿈이 생각나 얼른 눈을 감았다. 이..

시읽는기쁨 2017.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