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노래 /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지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 김남주 조국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인용해서 화제가 된 시다. '죽창가'라는 이름으로 노래로 불려졌는데, 원래 제목은 '노래'다. 제목에 따라 시가 주는 느낌이 다르다. '죽창가'라고 하면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의분이 일어난다. 조국 민정수석은 SNS로 이번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법률학자답게 냉철하게..

시읽는기쁨 2019.07.23

대한민국人 / 주영헌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원주민이라는 주민등록증도 있습니다. 봄철이면 중국발 황사를 다 함께 호흡합니다. 우리는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월드컵에는 붉은 옷을 입고 함께 큰 함성을 질렀습니다. 올림픽에는 "영미!"라고 같이 외쳤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국말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안녕'이라는 말까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니까'라는 말도 이해하겠습니다. 주어와 동사와 단어, 그 낱낱의 의미는 이해하겠는데,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목청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보니 감정의 격함은 알겠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

시읽는기쁨 2019.07.16

김씨 /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김씨 / 정희성 어제 양재기원에서 고씨와 만나 근 2년 만에 바둑을 두었다. 바둑팀이 해체된 뒤로는 바둑 둘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지인 중에는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는 바둑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바둑이 노년의 좋은 취미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맞는 수담(手談) 상대를 만나기가 어렵다. 삶이 ..

시읽는기쁨 2019.07.11

종남별업 / 왕유

중년 이후에는 도를 더욱 좋아하여 만년에 종남산 기슭에 별장을 마련했네 흥이나면 홀로 그곳으로 찾아가나니 얼마나 좋은지는 오로지 나만이 알 뿐이라 걷고 또 걸어 물길 시작되는 곳에 이르러 가만히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본다 우연히 산속에서 산골 노인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가는 길 잊었다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수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치林수 談笑無還期 - 終南別業 / 王維 시불(詩佛)로 불리는 왕유(701~761)의 전원 예찬이다. 왕유는 종남산 기슭에 터를 마련하고 관료 노릇을 하는 틈틈이 은둔 생활의 정취를 즐겼다. 말년에는 별장을 짓고 속세에서 떠나 불교에 심취하며 초연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 시는 그 시절에 지은 것 같다. 세상사를 잊은 유유자적이 부럽다. 오두막일..

시읽는기쁨 2019.06.22

서늘함 / 신달자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 서늘함 / 신달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이 먹는 것과 사람다움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관성대로 살다가는 삶이 누추해질 뿐이다. 젊어서는 패기였어도 늙어서는 주책이 된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덜어내고 덜어낼 일이다. 서늘해질 일이다.

시읽는기쁨 2019.06.17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시는 걸까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 그렇게 어머니는 영원히 가셨다 먼 곳 이승에다 아들 딸 모두 흩어 두고 가셨다 버들고리짝에 하얀 은비녀 든 무명 주머니도 그냥 두시고 기워서 접어 두신 버선도 신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혼자 훌훌 가셨다 어머니 가실 때 은하수 강물을 얼지 않았을까 차가워서 어떻게 어머니는 강물을 건너셨을까 어머니 가신 거기엔 눈이 내리지 않는 걸까 찬바람도 씽씽 불지 않는 걸까 어머니는 강 건너 어디쯤에 사실까 거기서도 봄이면 진달래꽃 필까 앞산 가득 뒷산 가득 빨갛게 빨갛게 진달래꽃 필까 어머니 사시는 집은 초..

시읽는기쁨 2019.06.08

초록 바람의 전언 / 고재종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 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 알을 쏟아 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 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 초록 바람의 전언 / 고재종 요사이 표현대로 하면 '초록초록'하고 '방실방..

시읽는기쁨 2019.05.30

외계인이 와야 한다 / 이영광

콩가루 집안도 옆집과 싸움 나면 뭉치고 툭탁거리는 아이들도 딴 학교랑 축구 하면 함께 응원을 한다 딴 동네 딴 도시 딴 지방과 다툼이 나면 한 동네 한 도시 한 지방이 된다 전라도와 사이가 틀어지면 경상도가 된다 경상도와 맞설 때면 전라도가 된다 북한과 다툴 때면 남한이 되고 일본 중국과 분쟁이 나면 한 민족이 된다 월드컵만 열렸다 하면 아우성치는 대한민국이 된다 그러므로 외계인이 쳐들어와야 한다 성간우주를 안마당처럼 누비고 다니는 외계 우주선들의 어마어마한 습격 앞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손을 잡을 것이다 서방과 아랍이 연대할 것이다 동아시아 제 국가들이 단결할 것이다 외계인이 와야 한다 기독교와 무슬림이 형제가 될 것이다 흑 백 황 적, 모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이 하나가 될 것이다 인간과 사자와 뱀..

시읽는기쁨 2019.05.22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이 노래하는 '봄..

시읽는기쁨 2019.05.07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일이 안 풀리는 걸 친척 탓하지 마라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초심 잃어가는 걸 생계 탓하지 마라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늙어가면서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 것도 적응할 수 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자연의 법칙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나 감성이 매말라가는 걸 느낄 때는 한숨이 나온다. 삶이 마른 풀잎처럼 드라이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

시읽는기쁨 2019.05.01

담배 피우는 여자 / 윤임수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여자, 오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여자, 지난밤도 편치 않았던 것일까, 아파트 모서리 중국단풍 아래에서 연방 담배를 피워대는 여자, 채 달아나지 못한 연기 꼬리에 또 연기를 더하는 여자, 숨 가쁘게 살아온 날들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듯 연방 연기를 토해내는 여자, 처음 볼 때는 거북했으나 날이 지나면서 연민으로 다가오는 여자, 어쩌다 보이지 않는 날이면, 웬일일까, 조금 걱정도 되는 여자, 걱정과 함께 담배 연기가 그 여자의 거친 날들을 모두 거두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치 오래된 관성처럼, 이제는 중국단풍만 봐도 떠오르는 그 여자 - 담배 피우는 여자 / 윤임수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태도에서 여자와 남자는 차이가 난다. 당당한 남자에 비해 여자는 조심..

시읽는기쁨 2019.04.21

봄은 스캔들이다 / 최형심

목련, 바람이 났다 알리바이를 캐내려는 흥신소 사내가 분주하다 흰 복대로 동여맨 두툼한 허리가 어딘지 수상하다 하루가 다르게 치마폭이 부풀어 오른다 여기저기 나뭇잎들이 쑥덕쑥덕거린다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온 개봉동에 다 퍼졌다 소문에 시달리던 목련,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몸을 활짝 열어젖힌다 봄이 뜨겁다 - 봄은 스캔들이다 / 최형심 연분홍 진달래는 염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뜨거운 소문이 온 산을 불태울 듯하다. 빨간 명자꽃은 요염하고 정열적이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벚꽃은 바람둥이처럼 흩날린다. 노란 개나리는 순진한 풋사랑이다. 목련은 어느새 아기를 뱄나 보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옛말이 맞다고 모두가 쑥덕거린다. 그렇다, 봄은 스캔들로 시끌벅적하다.

시읽는기쁨 2019.04.14

한국은 노래방 / 김승희

당신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에게 노래를 부를 것을 권한다 강요한다 애소하고 명령한다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있어 본 적 있는가 당신은 남북통일에 반대하는 사람 DMZ를 만드는 사람 수원지에 독극물을 붓는 사람 성수대교를 무너뜨리는 사람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바로 그, 그, 그 장본인이 된다 길은 이것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남겨두고 노래방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노래를 부르라고 부르라고 잡아끄는 친구들의 팔목을 절단해 버리고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당신은 체제 부정자가 된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노래부르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시읽는기쁨 2019.04.03

분매(盆梅) / 임영

백옥당 안에서 어느 날 문득 피어난 매화여! 벗님과의 술자리에서 고결한 미소를 짓누나 온 천지에 눈 내리고 찬 바람 휘몰아치는데 그대, 짙은 향기를 풍기며 어디메서 왔는가? 白玉堂中樹 開花近客杯 滿天風雪裏 何處得夫來 - 분매(盆梅) / 임영(林泳) 올해는 남도 지방에서 몇 그루의 고매(故梅)를 만났다. 매화는 선비가 지켜야 할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었음을 이번 길에서 확인했다.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말이 나타내듯, 어떤 가난과 고난에도 선비는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꽃을 피워내는 매화를 보며, 옛 선비들은 위안을 받고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다짐을 했을 것이다. 임영(林泳, 1649~1696)은 조선조의 문신이다. 경전과 역사서에 정통하였고, 제자백가..

시읽는기쁨 2019.03.27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 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오늘 점심은 시장에 나가 국수를 먹었다. 잔치국수 한 그릇에 4천 원이다. 집은 허름하지만 국수는 맛있고 양도 푸짐하다...

시읽는기쁨 2019.03.17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셀프 염색을 지켜보던 남편이 세월에 순응하는 것도 지천명의 덕목 아니겠냐 길래 산수국과 동박새와 늙은 등대와 길고양이 랭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대꾸하고서 서릿발 내린 머리카락이 물들기를 기다리다 별안간 목울대가 뜨거워져 엊그제 엄마에게 다녀왔는데 몰라보더라고 자식이 둘도 아닌 딱 하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무래도 반백 때문인 것 같다고 실토하며 어깨 들먹이는 - 슬픔을 물들이다 / 손세실리아 손세실리아 시인이 운영하는 북카페 '시인의 집'에 들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가에 앉아 조천 해변을 바라보고, 탁자에 놓인 책도 뒤적이고, 시인과 작은 대화도 나누었다. 따스한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시인의 집' 입구에 이 시가 적혀 있다. 시인의 최근작이라고 한다. 찬찬히 읽어 보니 울컥하게 된다. ..

시읽는기쁨 2019.03.08

동방의 등불 / 타고르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는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s And the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of the East -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 / 타고르(R. Tagore) 삼일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 아침이다. 100년의 무게감이 묵직하다.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함성을 생각한다. 그때 우리 민족의 꿈이 독립이었다면, 이 시대의 과제는 분단 극복과 통일이다. 어제 하노이에서는 북한과 미국 정상이 핵 담판에 ..

시읽는기쁨 2019.03.01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 장석남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새벽길에 나서서 서리 앉은 한길에 앉아보았지 갈비뼈가 가지런하듯 겨울은 길어 차분하게 정이 들고 긴 겨울 동안 매일의 새벽은 이러한 고요를 가지고 왔던가 매 새벽마다 이걸 가져가라 함이었던가 왜 그걸 몰랐을까 겨울은 가면서 매 새벽마다 이 깨끗한 절망을 가져가라 했던가 꽃씨처럼 꽃씨처럼 -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 장석남 낮 기온이 10도 중반까지 올라가니 봄이 확 다가온 듯하다. 즐겨 입었던 패딩 옷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동백꽃이 떨어지듯 한순간에 툭, 하고 겨울이 꺾이는 것 같다. 올겨울은 힘들게 보냈다. 그 여파가 아직 내 몸 안에는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선지 이 시 제목에 끌리면서 여운이 깊게 남는다. 내용 중에서는 '깨끗한 절망'이라는 구절에 오래 머문다...

시읽는기쁨 2019.02.25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오는' 소리만 알았지, '가는' 소리를 의식하지는 못했다. 오는 게 있으면, 응당 가는 것도 따른다. 삼라만상의 변화가 그러하다. 누구나 이 세상에 던져지듯 왔다가 불현듯 사라져 간다..

시읽는기쁨 2019.02.16

월훈(月暈) /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드러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

시읽는기쁨 2019.02.09

됐심더 / 곽효환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았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애련한 시를 쓰는 한 시인이 선배 시인의 소개로 고고했으나 불의의 총탄에 세상을 뜬 영부인의 전기를 썼다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불행한 군인이었던 대통령이 두 시인을 안가로 초대했는데 술을 잘 못하는 풍채 좋은 선배 시인은 그저 눈만 껌벅였고 왜소했으나 강단 있는 두 사내가 투박한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양주 두 병을 다 비웠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시인의 살림살이를 미리 귀띔해 들은 대통령이 불쑥 물었다 "임자, 뭐 도울 일 없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인이 답했다 "됐심더" 강과 바다가 만나 붉게 타오르는 강어귀 언덕에서 가난 섞인 울음을 삼키던 여학교 사환이었던 소년은 꿈꾸던 시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일생을 적막하게 살았고 만년을 쓸쓸히 병마에 시달리다 눈을..

시읽는기쁨 2019.02.01

겨울 나무 / 이원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지내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 겨울 나무 / 이원수 겨울에는 산에 거의 가지 않지만, 가볍게 오르는 뒷산 길에서 가끔 이 동요를 읊조린다. 산꼭대기 가까운 비탈에 이 노래와 비슷한 이미지의 겨울 나무가 있다. 지금도 초등학생이 이 노래를 배우는지 모르지만 우리 때는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노래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아이들보다 차라리 지금의 나한테 더 맞는 것 같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이 구절만으로도 쉽게 감정 이입이 되며 나무를 쓰다듬게 된다.

시읽는기쁨 2019.01.25

광양 여자 / 이대흠

청보리 필 때는 청보리처럼 푸르게 웃음 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잦은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몸 속 탱자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 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 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터로 있는 게 즐거워서 오래도록 눈 마주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찬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

시읽는기쁨 2019.01.19

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곽효환

섬섬한 별들만이 지키는 밤 사랑채에서 마당 건너 뒷간까지는 수많은 귀신들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었다 깊은 밤 혹여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새까만 어둠 속에 득실거리는 더 새까만 귀신들 때문에 창호지를 바른 덧문을 차마 열고 나갈 수 없었다 대청 들보 위에는 성주신 부엌에는 조앙신 변소에는 측간신 그리고 담장 밖에는 외눈 부릅뜬 외발 달린 도깨비들.... 숨죽이며 가득 찬 오줌보를 움켜쥐고 참던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끝내 울음을 터뜨려 잠든 할아버지를 깨우곤 했다 문틀 위에는 문신이 파수를 서고, 지붕 위에서는 바래기기와귀신이 망을 보고, 어스름밤 골목에서는 달걀귀신이 아이들의 귀갓길을 쫓고, 뒷산 묘지에는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 더 먼 산에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우리가 사는 ..

시읽는기쁨 2019.01.12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물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소년 시절 겨울 풍경을 소환해 본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봐도 온종일 논 것밖에 없다. 학원도 없었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잔소리도 없었다. 낮에는 앞 논에 나가 '씨게또'를 타고, 양지바른 마당에서 뜀박질하며 놀았다...

시읽는기쁨 2019.01.02

사랑 / 김중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핧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 사랑 / 김중 곁불만 쬐며 살아왔다. 가까이 가면 너무 뜨거워 고개 돌렸다. 한 여인만이겠는가. 삶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실로 삶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자서전을 쓰려 해도 소재가 없는 인생..

시읽는기쁨 2018.12.25

무심천 / 도종환

한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서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을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

시읽는기쁨 2018.12.20

옛날 사람 /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 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

시읽는기쁨 2018.12.15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네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 廬山煙雨浙江潮 未到千般恨不消 到得還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 廬山煙雨 / 蘇東坡 이번 겨울 첫 추위가 닥쳤다. 속물이어선지 소동파 하면 동파육이 먼저 떠오른다. 동파육에 연태고량주 한잔하면 딱 좋겠다. 추울 때는 독한 술이 제일이지. 그런데 지금은 장염약을 먹으며 속을 달래는 중이다. 소동파는 긴 유배 생활 중에도 자신만의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 시인이었다. '산은 산, 물은 물'의 어원도 이 시가 아닐까. 선풍(禪風)이 감지되는 시다. 힘든 걸음 해서 가보지만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일까. 그러나 '별다른 게 없다'는 말에는 깊은..

시읽는기쁨 2018.12.10

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안 듣고 싶어요 ..

시읽는기쁨 2018.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