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12

만지고 싶은 기분

뮤지션이자 작가인 요조의 산문집이다. 요조 작가는 '책, 이게 뭐라고'라는 팟캐스트에서 목소리로 친근해진 터여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음악을 하고 글 쓰는 여성의 섬세한 감성을 느끼고 싶은 면도 있었다. 일흔 넘어 자꾸 무디어지는 감성을 이런 식으로라도 보충하지 않으면 내 생각과 삶이 너무 삭막해질 것 같아서였다. 예상한 대로 따스하면서 여린 작가의 마음씀을 글을 통해 접할 수 있어 좋았다. 글은 상당 부분 글 쓴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분 같다. 그러면서 작고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이 잔잔하게 흐른다. 제주도에 '책방 무사'라는 서점을 연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익숙하게 싫어하던 대상에 낯설게 임해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묘연해질..

읽고본느낌 2024.04.23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요즈음 정치에 입문한 어떤 분이 '십 원 한 장' 남에게 피해를 끼..

시읽는기쁨 2021.07.10

끌림

이병률 작가의 감성 충만한 여행기다. 여행지와 작가의 교감이 글과 사진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카메라 하나 들고 혼자서 계획 없이 떠돌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낯선 도시 뒷골목에 허름한 숙소를 정하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싶다. 며칠 빈둥거려도 좋겠다. 이런 여행에 대한 로망 하나 나에게도 있다. '포카라에서 열흘'을 꿈꾼 게 십 년이 넘었지만 유효기간은 아직 남아 있다. 반으로 평가절하된 네팔 화폐도 여전히 내 지갑 속에서 제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언젠가는 오겠지. 작가의 글 한 편을 옮긴다. 좋아해 낡은 옷을 싸들고 여행을 가서 그 옷을 마지막인 듯 입고 다니는 걸 좋아해. 한 번만 더 입고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 계속 빨고 있는 나와 그 빨래가 마르는 것, 그리고..

읽고본느낌 2020.01.17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일이 안 풀리는 걸 친척 탓하지 마라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초심 잃어가는 걸 생계 탓하지 마라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늙어가면서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 것도 적응할 수 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자연의 법칙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나 감성이 매말라가는 걸 느낄 때는 한숨이 나온다. 삶이 마른 풀잎처럼 드라이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

시읽는기쁨 2019.05.01

강신주의 감정수업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특히 다양한 감정 변화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동물은 식욕과 번식욕에 따른 몇 가지 감정이 전부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와 욕망에 따른 무수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산다. 인간의 이성의 동물이면서 감정의 동물이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부정되기까지 했다. 마치 몸이 멸시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압하면 행복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샘솟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다는 기쁨을 맛본다. 환희나 영광만 아니라 슬픔, 비애, 절망 등의 감정도 우리에겐 소중하다. 은 철학자 강신주 선생이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하고 설명을 붙인 책이다. '감정의 철인'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기본으로 깔고, 그 감정이 드러난 문학 작품을 소개한..

읽고본느낌 2019.01.15

감성에 물주기

늙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들라면, 건강한 무릎 연골과 살아 있는 감성이라고 답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자주 꼽는 돈과 친구도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연골과 감성의 뒷순위다. 돈은 생존하기에 적당한 양만 있으면 되고, 친구가 없으면 혼자서도 잘 놀 줄 알면 된다. 중요한 건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인 감성이다. 는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다. '일상기록공작가'로 자처하는 공혜진 님이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 100가지를 보여준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우리 삶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랗게 나선형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제와 같은 패턴을 그리는 듯하지만, 어제 그려진 원과는 결코 만나지 않는 나선형이다. 그래서 오늘 ..

읽고본느낌 2014.09.29

생각이 나서

쓸쓸하지만 따뜻한 글이다. 늦가을 창가에 외로이 앉아 달콤한 커피향을 음미하는 느낌이 난다. 지은이 특유의 감성이 반짝인다. 그래도 생을 긍정하는 마음이 곱다. 황경신의 에서 눈길 멈춘 곳을 옮겨 본다. 흑백사진 흑백사진을 찍으려면 흑백필름을 넣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사진을 찍은 후에, 음, 이 사진은 컬러보다 흑백쪽이 좋겠어, 하고 수정을 가하여 흑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름을 끼울 때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 끼운 필름을 중간에 교체하기는 어려우니 그때부터 카메랑 담기는 모든 풍경과 인물은 흑백이 된다. 가끔 이런 장면은 컬러로 찍어야만 그 맛이 사는데, 싶기도 하지만 과감하게 남은 필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은 사진이 ..

읽고본느낌 2014.04.07

안녕들 하십니까?

어느 대학생이 붙인 대자보가 잔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과 부드러운 내용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보통 대자보라고 하면 운동권 용어를 쓰는 격문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변했다. 원리주의적 이념이나 투쟁적 언어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피부에 닿는 소통과 공감의 언어가 아니면 관심을 끌 수 없다. 학생의 대자보는 사회 현실이나 정치에 무관심한 학우를 비판하기에 앞서 안녕들 하시냐고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감성적으로 접근하니 마음이 열린다. 안녕하지 못하다고 응답하는 많은 대자보가 이를 증명한다. 전에 진보 쪽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분이 방송 연설 때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란 멘트를 해서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젠 혁명도 감성..

길위의단상 2013.12.20

블로그는 내 삶의 활력소

직장 동료들과 영화 '줄리 앤 줄리아'[Julie and Julia]를 보았다. 원래는 '위대한 침묵'을 보려고 갔으나 의외로 표가 매진되어 들어가지 못하고 대타로 본 것이다.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를 잡는다고 그냥 시간 땜질용이었는데 내용이 무척 좋았다. 줄리와 줄리아 두 여성의 요리를 매개로 한 실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줄리아... 1950년대에 외교관 남편을 따라 파리 생활을 시작한 줄리아는 낯선 곳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명문 요리학교에 입학하여 낙천적인 성격과 피나는 노력으로 프랑스 요리의 달인이 된다. 처음에는 양파를 썰 줄도 몰랐으나 집에서 밤을 새우며 몇 푸대의 양파로 연습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나중에는 프랑스 요리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TV 요리 프로그램의 강사로도 활..

읽고본느낌 2009.12.20

이외수의 감성사전

평화 전쟁 발발의 합리적 근거 주인공 작중 인물 중에서 가장 목숨이 끈질긴 존재 허수아비 농업에 이용되었던 인류 최초의 로봇 엑스트라 연기에는 태연하고 인기에는 초연한 존재 시계 하루를 시간별로 스물네 토막씩 절단하는 기계 정신병자 제 정신만으로 살아가는 인격자 모래 주로 해변에 많이 산재해 있는 최소 단위의 금빛 혹성 식인종 인구증가와 식량증가를 동일시하는 종족 총알택시 승객과 기사를 장약하여 죽음을 향해 발사되어진 지상용 교통미사일 명예박사 자신이 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학이나 학술단체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람 불만 불연소된 욕심의 찌꺼기 고성방가 소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 불필요성을 타인에게 확실하게 알리는 행위 수면제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외로움은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일용하..

읽고본느낌 2009.11.13

은총의 감성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은총의 감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은총'이라는 말이 비종교인에게는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의 나를 이루는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이웃이나 다른 외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받아들이는마음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기독교인이든 불교도이든 종교인이란 은총을 믿는 사람들이다. 즉,대상이 누구든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 또는 최상의 것을 그로부터 거저 받았다는 감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감성'도 내가 무척 좋아하고 아끼는 말이다. 감성은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에서 돋아나는 새싹이다. 사물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의 본모양대로 볼 수 있는 눈이다. 감성은 여리고 여성적이며 수동적..

참살이의꿈 2008.03.10

마음사전

사람을 지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난 지성적인 쪽에 속한다고 해야겠다. 이제껏 살아온 길이 그러했다. 감성은 애써 무시했고, 오직 이성만이 믿고 따를 만하다고 생각했다. 애초 감성이 발달하지도 않았지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감성의 감촉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이 점점 감성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감성의 미묘한 촉감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고, 불분명하긴 하지만 감성이 가리키는 길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도 생긴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면성이 바로 지성과 감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는 얼음처럼 차갑고, 하나는 섬세하며 따스하다. 하나가 부성적이라면, 하나는 모성적이다. 지성이 산문이라면, 감성은 시다. 지..

읽고본느낌 2008.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