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4

나무 기도 / 정일근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린 너무 빠르다, 세상은 달려갈수록 넓어지는 마당 가졌기에 발을 가진 사람의 역사는 하루도 편안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냥 나무처럼 붙박혀 살고 싶다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어린 자식 기르며 말씀 빚어내고 빈가지로 바람을 연주하는 나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세상은 또 너무 입이 많다 입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적을 만들고 그리하여 입 속에서 전쟁이 나온다 말하지 않고도 시를 쓰는 나무의 은유처럼 온몸에 많은 잎을 달고도 진실로 침묵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은 베풀 때 완성되느니 그늘 주고 꽃 주고 열매 주는 나무처럼 추운 아궁이의 뜨거운 불이 되어주기도 하고 사람의 따뜻한 가구가 되는 나무처럼 가진 것..

시읽는기쁨 2017.01.01

기도 / 김수영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

시읽는기쁨 2016.12.21

커피 기도 / 이상국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속으로 그러다가 기도를 마친 모녀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서야 나도 커피를 마셨다 - 커피 기도 / 이상국 천주교에 입교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성호경을 긋고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배웠다. 배운 대로 온전히 실천하던 때였다. 청계산에 등산을 갔는데 여름이라 목이 탔다. 마침 산정 가까이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보통 하던 대로 돈을 내다가 흠칫했다. 막걸릿잔을 들고 성호경을 긋는 게 너무 이상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까, 결국은 ..

시읽는기쁨 2016.06.22

새해 기도

나이가 드니 새해의 설렘도 줄어든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질 건 크게 없다는 걸 삶으로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새해의 각오나 기도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불꽃놀이는 짧고, 뒤에는 여일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복'이나 '행복'이 너무 남발되는 신년의 분위기가 별로 탐탁치 않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열두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TV로나마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결국 한 해가 가기는 갔구나, 라는 느낌에 뭉클해졌다. 작년은 우리 가정에서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그만큼 노심초사하며 보낸 해도 없었다. 다시 되살려보기도 싫어서 한 해의 감상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세월의 매듭이 있다는 게 고맙다. 달력을 새로 걸며 힘든 과거가 끊어져 나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치유의 ..

길위의단상 2015.01.01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

시읽는기쁨 2014.07.25

성탄절의 기도

더 낮아지고 더 비워지기를 바라는 기원이 촛불로 타오르는 아침에....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 고린토2서 8, 9 "주님은 거대한 분이시지만 스스로 작아지셨습니다. 주님은 부유하지만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주님은 권력자이시지만 스스로 연약해지셨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맨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은 맨 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씀이 참된 빛이셨으니 그 빛이 세상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분이 세상에 계..

사진속일상 2013.12.25

마십시오

"당신이 다만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기주의 속에서 혼자 떨어져 살고 있다면 '우리'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매일 아들로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과 물질적인 성취를 혼동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고통스러울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약도 없이, 집도 없이, 직장도 미래도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형제에 대한 한을 품고 있다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계속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참살이의꿈 2013.08.10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새해 새 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 해마다 주시는 새 날이 온 땅에 밝았습니다 올해에는 하늘을 기르게 해주십시오 우리 몸 속에 심어주신 하늘 싹 고이 길러 마침내 하늘만큼 자라나 사람이 곧 하늘임을 스스로 알게 해 주시고 칼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칼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시고 돈의 힘을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시고 부끄러운 성공보다 오히려 떳떳한 실패를 거두게 하시고 유명한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착한 일 하다가 지친 이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을 가슴 깊이 파주시고 마음이 깨끗해서 슬픈 이들에게는 다함없이 흐르는 맑은 노래 들려주시고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기 전에 작은 촛불, 촛불 하나 밝히게 하시고 솟아오른 봉우리를 부러워하기 전에 솟..

시읽는기쁨 2011.01.01

기도 / 서정주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합니다 주여 (이렇게밖엔 당신을 부를 길이 없습니다)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 기도 / 서정주 내 옆 동료는 미당을 비아냥거르듯 늘 말당이라고 부른다. 그의 친일 행적만 아니라 그 뒤에도 정권에 빌붙는 처신 때문이다. 시에서 감동을 받더라도 시인의 실제 모습을 알고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말 따로 사람 따로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시인에 해당될 때는 더욱 실망하게 된다. 시인이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처럼 아름답게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시읽는기쁨 2007.06.02

정의를 위한 주님의 기도

자선 행위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라면 사회 정의는 그 구조를 변화시켜 지나치게 빵을 많이 갖는 사람도, 빵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만연히 이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자선 행위라면 구체적으로 인종 차별을 다루는 것이 사회 정의이다. 전쟁의 피해자들을 돕는 것이 자선 행위라면 전쟁을 유발하는 궁극적 요인을 지닌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 사회 정의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유도하는 것이 자선이라면 가난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정의다. 제도적 이해가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개인으로서 살 수 있다(교회에 잘 나가고 기도하며,..

읽고본느낌 2006.09.05

기도 / 야마오 산세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다여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고쳐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산이여 우리의 병든 욕망을 치유해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강이여 우리의 병든 잠을 고쳐 주셔요 그 푸른 시냇물 소리로 편안한 잠자리를 되찾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여래여 우리의 병든 과학을 고쳐 주셔요 모든 생명에 봉사하는 과학의 길을 찾아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무여 우리의 침울해 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축복해 주셔요 그 곧게 선 푸른 모습에서 우리들도 또한 조용하고 깊게 곧게 설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람이여 우리들의 ..

시읽는기쁨 2004.09.14

기도

샌, 조금은 바보처럼 살자! 샌, 조금은 모자라게 살자! 샌, 조금은 욕심을 버리자! 샌, 조금은 마음을 비우자! 가앙 가앙..... 가을 하늘은 자꾸만 높아만 간다. 꾸역 꾸역..... 늘어나는 욕심으로 나는 자꾸 무거워진다. 이 좋은 계절 가운데서 나는무너지고 있다. 상대를 모르는 싸움에 지쳐가고 있다. 하느님! 제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현실을 받아들을 수 있는넉넉함을 주소서. 세상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는 감히 청하지 않사오나 그러나 당신의 따스한 한 마디가 그립습니다. 그 한 마디면 다 족하겠습니다.

참살이의꿈 200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