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식 3

나의 임종은 / 김관식

남향 미닫이, 재양한 마루끝에 귀여운 젖먹이 무릎에 안고 앉아 조용히 엄마의 얼굴처럼 화색이 되는 자애로운 하늘 아래 하찮은 미물들과 푸나무 떨기조차 은총에 젖어 축복을 받는 오늘은 춘분! 낮과 밤이 같은 날. 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마 비인 방에 호올로 누워 천고의 비밀을 그윽히 맛보노니... 가여운 아내 아들딸들아. 아이예, 불쌍한 울음일랑 들레지 말라. 그동안 신세끼친 여숙을 떠나 미원한 본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벌판에 내던지면 소리개와 사갈의 밥이 될 게고 땅에 묻으면 아미와 구더기의 즐거운 향연. (발가숭이로 왔으니 발가숭이로!) 불타여. 피 빨아먹고 산 공변된 공변된 업이요 보가 아니오니까. 백운대 위에 세워 풍장을 해도숱연키야 하..

시읽는기쁨 2011.01.29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밥벌이로서의 일, 처성자옥(妻城子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내 속마음도 훌훌 벗어놓고 아무도 없는 산골에 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세상과 등진 채 살아보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는 그곳이라면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애증도 잠잠해질 것 같다. 졸졸 속삭이며 흐르는 물가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사람이 그리워질까? 인간의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할까?

시읽는기쁨 2007.05.11

옹손지 / 김관식

해 뜨면 굴(窟)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나물죽 한 보시기 씨래기 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襤褸)를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지면 굴(窟)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 옹손지(饔飡志) / 김관식 인간에게는 자유 본능이 있다. 그것이 일상의 굴레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렇지 않다면 노예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세속적 명리를 추구하다가도 '이건 아닌데'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옹손지(饔飡志)란 아침, 저녁의 끼니를 뜻한다고 한다.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나 먹고사니즘에서의 초탈을 꿈꾸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은 보통 사람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생은 짧고 불..

시읽는기쁨 2007.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