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3

아버지의 팔자 / 김나영

'아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 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 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까지 시켜 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만 원이 넘는 돈을 삼 일 만에 펑펑 다 써 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질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

시읽는기쁨 2023.03.27

나의 유물론 / 김나영

왜 하필 느끼한 레스토랑이냐고 툴툴거리는 남편의 식성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생일날에 다친 마음도 밥 앞에서는 이내 맥을 못 추는 나는 이 세상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족속이다 평일보다 더 못한 기념일 소화되지 않는 속내와 날이 서는 내 눈초리에 선물 대신 뒤늦게 내미는 남편의 돈봉투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순간 손끝으로 좌르르- 전해오는 돈의 두께에 다친 마음이 초고속촬영을 하듯이 아물고 있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지만 그것은 두꺼운 성경책 안에서나 통하는 말 돈의 위력 앞에 뭉쳐있던 내 속과 눈꼬리가 순식간에 녹진녹진 녹아났다 조금 전까지 야속하던 남편도 면죄하고야마는 나의 종교는 유물론에 더 가깝지 싶었다 내 안에서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울컥 올라왔지만 빳빳하고 두둑한 돈을 꽉 움켜쥐..

시읽는기쁨 2018.07.02

연장론 / 김나영

다 꺼내봤자 세치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아이 눈에 박힌 티끌 핥아내고 한 남자의 무릎 내 앞에 꿇게 만들고 마음 떠난 애인의 뒤통수에 직사포가 되어 박히던, 이렇게 탄력적인 연장이 또 있던가 어느 강의실, 이것 내두른 대가로 오 만원 받아들고 나오면서 궁한 내 삶 먹여 살리는 이 연장의 탄성에 쩝! 입맛을 다신다 맛이란 맛은 다 찍어 올리고 이것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덕분에 내 몸 거둬 먹고 살고 있다면 이처럼 믿을만한 연장도 없다 궁지에 몰릴 때 이 연장의 뿌리부터 舌舌舌 오그라들고 세상 살맛 잃을 때 이 연장 바닥이 까끌까끌해지고 병에서 회복될 때 가장 먼저 이 끝으로 신호가 오는 예민한 이 연장,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사마천은 이것 함부로 놀려서 궁형의 치욕을 한비자는 민첩하게 사용 못한 죄로 사약..

시읽는기쁨 2011.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