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12

허송세월

동네 서점에서 산 일곱 권의 책 중 하나다. 한 달 만에 10쇄를 찍었으니 김훈 작가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겠다. 나 역시 작가의 문체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공감한다. 작가에게는 세계에 대한 깊은 응시와 인간에 대한 따스한 연민과 애틋함이 있다. 이 책에서는 불교적 세계관도 자주 느껴졌다. 특히 '흐름'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인간의 삶도 자연의 큰 흐름과 연계하게 된다. 비교하기에 뭣하지만 김형석 선생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소설가가 훨씬 더 철학적이다. 책 제목으로 쓰는 '허송세월'이란 글은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로 시작한다. 음미하고 사색하는 철학자의 글이다. 이런 말도 참 좋다."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

읽고본느낌 2024.11.19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문명과 야만의 충돌과 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에 대해 썼다고 말했다. 소설의 무대는 대륙의 넓은 땅인데 동서로 흐르는 나하(奈河)를 경계로 북쪽의 초(草)와 남쪽의 단(旦) 두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초는 유목민족이고 단은 농경민족인데, 초가 단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두 나라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작가가 지어낸 것이다. 역사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때도 역사 기록 이전의 아득한 옛날이다. 사람과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말이다. 야백(夜白)과 토하(吐霞)라는 두 말인데 전쟁터를 누비며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만 결국에는 야생 상태의 말의 길을 찾아간다. 야백이 스스로 이빨을 빼서 재갈을 벗는 장면은..

읽고본느낌 2020.12.22

연필로 쓰기

최근 지인으로부터 일산 호수공원에서 김훈 작가를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가는 20년째 일산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호수공원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다. 의 전반부는 호수공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이 소재로 등장한다. 일산 호수공원에 나가면 벤치에 앉아 있는 작가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김훈 작가는 글을 쓸 때 연필을 고집한다. 컴퓨터의 편리함을 알겠지만 연필이 주는 아날로그의 감성을 버리기 싫은가 보다. 글 쓰는 행위나 문체에서 작가 특유의 고집이 읽히기 때문에 작가를 좋아한다. 건조한 듯 담백한 듯하면서 의미의 정수를 캐내는 작가의 문체도 좋다. 는 작년에 나온 작가의 산문집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치열한 삶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특히 신문에 발..

읽고본느낌 2020.05.28

'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눈을 통해 인간과 인간 세상을 얘기하는 김훈 작가의 소설이다. 보리의 주인은 댐 건설로 집이 물에 잠기게 되어 고향을 떠나는 수몰민 가족이다. 어촌에 터를 잡았지만 고기잡이하던 가장이 죽자 다시 외지로 내쫓기듯 떠난다. 이 책의 부제는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다. 인간이나 개나 생명 가진 것이 살아가는 고단한 숙명이 안타깝게 그려진다. 나는 개를 싫어한다. 밖에서 어쩌다 개를 만나면, 개 역시 그런 나를 아는지 유난히 나만 보면 경계하면서 캉캉 짖어댄다. 누가 자기에게 적대적인지 눈치 하나는 빠른 것 같다. 에 나오는 보리는 인간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웬만큼은 알아챈다. 보리에 비라면 오히려 인간의 개에 대한 몰이해가 깊다. 작가는 세상의 개를 대신해서 짖는다고 했다...

읽고본느낌 2020.03.18

흑산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1800년 전후 시기의 천주교 박해가 중심 이야기다.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피폐한 백성의 삶이 바탕에 깔려 있다. 무겁게 읽히는 책이다. 시대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려져 간 인간의 고통과 눈물이 김훈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져 있다. 이라는 제목만 보면 정약전이 주인공인 것 같은데, 이 책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정약전이 등장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정약전과 황사영을 중심으로 이들과 관계된 다수의 인물이 모두 주인공이다. 황사영의 부인인 정명련, 정약현 집 노비였던 김개동과 육손이, 마부 마노리, 아전 출신의 첩자 박차돌, 퇴물 상궁 길갈녀, 국밥집 주모 강사녀, 도망친 노비 아리 등의 이야기가 천주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읽고본느낌 2020.02.23

[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몇 달 전 조선일보에 실린 김훈 작가의 글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잘 죽는 법은 지금 잘 사는 도리밖에는 없다. 잘 살았다고 믿더라도 꼭 잘 죽는다는 보장도 없지만..... 글 전문을 옮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김훈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

참살이의꿈 2019.10.20

공터에서

김훈의 근작 소설이다. 작가의 문체에 끌려 이 책을 찾아 읽었다. 김훈은 가장 개성 있는 작가다. 짧고 건조한 문장이 매력이 있다. 감정이 배제된 서술은 시베리아의 찬바람 같다. 이즈음에 더욱 만나고 싶은 글이다. 이 소설에서도 김훈의 문체는 도드라진다. 반면에 내용은 밋밋한 편이다. 그것 역시 작가의 특징인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김훈의 문체는 스케일이 큰 경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비장미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에서 대규모 전투와 순장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는 마 씨 가족 두 세대의 역사를 담았다. 일본 강점기 시대, 해방, 6.25 전쟁, 월남전, 군부독재 등 파란만장했던 근대사 속에서 살았던 힘 없는 민초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

읽고본느낌 2017.04.23

라면을 끓이며

김훈의 산문집이다. 새로 쓴 글도 있고, 예전에 발표되었던 글도 들어 있다. 밥, 돈, 몸, 길, 글 등 다섯 가지 주제로 글이 묶여 있다. 작가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읽을 수 있으나 잡화점에 들어간 듯 산만한 감도 있다. 글은 역시 김훈 만의 색깔이 드러난다. 문체만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길이 특이하다. 작가의 안테나는 세상살이의 스산함에 주파수가 맞춰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모든 문장에 들어 있다. 작가는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이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김훈의 글에서는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가 묻어난다. 글 쓰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런 진지함이 느낌의 깊이를 아득하게 한다. 사소해 보이는 존재나 현상에서도 의미를 찾아낸다. ..

읽고본느낌 2015.12.22

꽃 피는 삶에 홀리다

도서관에 회원 등록을 했다. 집에서 걸어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시설도 좋고 직원들도 친절하다. 앞으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도서관에서 보낼 생각을 갖고 있다. 오랜만에 책 속에 묻히니 행복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김훈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과 를 빌렸다. 사람에 인품이 있다면 글에도 문품(文品)이 있을 법하다. 는 미술사학자인 손철주 선생의 에세이다. 주로 그림에 얽힌 얘기를 중심으로쓴 글인데고전적인 아취가 풍긴다. 마치 오래된 도자기를 완미하는 듯하다. 예술에 대한 지식도 놀랍지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깊은 품격이 느껴진다. 부러울 뿐이다. 책머리에 나오는 '글맡에서'라는 글도 귀하다. 눈이 나빠져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시야가 좁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야가 좁으면 어떻게 ..

읽고본느낌 2011.04.22

내 젊은 날의 숲

동료가 이 책을 선물했다. 김훈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내가 김훈의 애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단문이 그분 글의 매력이다. 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민통선 안의 격리된 수목원에서 꽃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그녀의 삶은 단조롭고 드라이하다. 격렬한 감정의 충돌도 없고 열정적인 사랑도 없다. 몇몇 등장인물들과 유해발굴단의 유골 묘사를 통해 인생의 쓸쓸함과 무의미성이 그려지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 공통되는 산다는 것의 막막함이 조금 스타일을 달리 하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은 6.25 때의 전사자 유골발굴단 작업에 참여한다. 발굴 현장의 유골을 세밀화로 그리..

읽고본느낌 2011.01.19

공무도하

간결한 문체 때문에 김훈의 글에 끌린다. 그분의 글은 짧고 건조하다. 살이 붙어있지 않은 생선 가시 같다. 감정의 낭비가 심한 글보다 이런 드라이한 글이 마음에 든다. 이런 문체는 삶의 비애를 드러내는데 알맞다. 그분은 늘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대해 말한다. 일상은 비루하고 치사하다.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세계를냉혹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세상의 치부는 숨을 데가 없다. 에서 가야의 순장 장면과 백제군의 집단 처형 장면은 나로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비극을 그릴 때 김훈 문체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번에 를 읽은 것은김훈 문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다. 소설에는 비극적 인물 군상들이 병렬로 등장한다. 개에게 물려죽은 판잣집 아이, 누이를 강간하는 아비를 죽인 청년, 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 ..

읽고본느낌 2010.09.24

현의 노래, 칼의 노래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와 '칼의 노래'를 읽었다. 미려한 문체로 소문난김훈의 글을 그동안은접하지를 못했는데, 이는 김훈에 대한 선입견도 한 원인이었다. 그분의 인터뷰를 기사나 TV로 보았을 때 지나치다 싶은 솔직성과 현실주의가 왠지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해석하는 그분의 견해가 옳다고 느껴지는 일면이 있지만 나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두 소설을 읽어보면서 김훈 특유의 글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바탕에 깔린 사상이랄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도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탐미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삶의 비극이랄까 눈물겨움 같은 것,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애상이 두 편의 소설에 공통적으로 녹아 있었다.낭만과 서정의 포장을..

읽고본느낌 2007.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