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10

그냥 둔다 / 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그냥 둔다 / 이성선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으면서 비움과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한다고 비워지고 내려놓게 되지야 않지만 일상이 비틀어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이다. 늘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누가 집어넣은 것이 아닌 내 스스로 만든 근심덩이다. 잔뜩 움켜쥐고는 힘들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의미 있음이나 없음으로 가치를 나눌 수 없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할 뿐 내 분별심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주관과 아집에 의해서 '있는 그..

시읽는기쁨 2022.08.16

힘 빼는 데 3년

"힘을 빼라" "부드럽게 밀어라", 당구를 칠 때 옆의 고수한테서 자주 듣는 말이다. 수 년째 똑같은 지적을 받고 있으나 말처럼 쉽지 않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힘을 빼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들었다. 아마 10년 정도 지나서야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고 운동선수들이 흔히 말한다. 전문 선수들이 그럴진대 일반 아마추어는 오죽하겠는가. 운동에서 힘 빼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이기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힘주어 친다고 공이 세게 나가는 게 아니다. 근육이 경직되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니 몸에 힘만 잔뜩 들어갈 뿐이다. 멘털 스포츠인 바둑도 마찬가지다. 힘이 들어간 수는 ..

참살이의꿈 2021.02.02

지나가고 떠나가고 / 이태수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 지나가고 떠나가고 / 이태수 다사다난(多事多難) - 연말이면 상투적으로 쓰지만, 올해는 이 말이 정말 실감 난다..

시읽는기쁨 2020.12.31

속 빈 것들 / 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 속 빈 것들 / 공광규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

시읽는기쁨 2020.02.19

행복을 위해 버려야 할 것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버려야 행복해지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미국의 재무설계사인 폴란이란 분이 말하는, 버려야 축복인 여덟 가지가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나이 걱정 - 사람은 태어나 나이가 들어가며 어느 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버는 돈이 늘어나고 지위가 높아진다. 그러나 언젠가는 기력이 쇠해지고 기억력이 떨어지며 직장에서 나갈 날을 세게 된다. 젊은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하거나 젊은 시절의 나와 비교하다 보면 나이가 걱정이다. 인생은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과정이다. 힘들게 올랐으니 이제 여유를 갖고 기쁜 마음으로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기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을 뿐 우위를 따질 수는 없다. 걱정 대신 나이 드..

참살이의꿈 2019.06.11

마른 들깻단 / 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늦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단,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미끄럽다 - 마른 들깻단 / 정진규 고소한 깨보다 들판의마른 들깻단에 더 시선이 가는 나이가 되었다. 젊음의 패기와 욕망도 좋지만 노년의 텅 비워지고 가벼워진 마른 자리도 아름답다. 인생에는 이루어야 할 때가 있고, 비우고 내보내야 할 ..

시읽는기쁨 2008.12.02

당신의 슬픈 모습

당신의 슬프고 지친 모습에 내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알지만 위로해 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해 더욱 안타깝습니다. 어제는 신문 간지로 들어온 광고지들이 거실에 놓여있는 걸 보았습니다. 당신은 다급한 마음에 이곳저곳 알아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 혼자 짐을 떠안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 안스럽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생긴 탓에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처럼 나 또한 세상이 밉고 세상 사람들에 화가 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속 상해 해도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들 마음의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고 화풀이를 한들 부메랑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언젠가 얘기했듯 똥파리들의 무리에 휩쓸릴 생..

길위의단상 2006.11.09

기도 / 십자가의 성요한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

시읽는기쁨 2006.03.01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작년에 대학로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친구의 소개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만아직 소녀같은 얼굴과 편안하게 느껴지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음 비우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원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읽는기쁨 200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