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겨울 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겨울 산 / 황지우 이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우리가 월세로 내야 하는 게 고통이란다. 고통의 해석이 신선하다. 살면서 응당 지불해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고통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을 수도 있다. 시인은 겨울 산에 올라서 사람만 아니라 산 역시 견디며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물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연유로 집에서 나왔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걸 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가 너그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회주의자'라는 단..

시읽는기쁨 2021.10.04

평화를 빕니다

처음 가톨릭 미사에 참예하였을 때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죄를 회개하면서 "내 탓이오"라고 오른손으로 왼편 가슴을 세 번 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미사 끝 부분에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신자들끼리 나누는 인사였다. 요사이는 성당 미사에 가뭄에 콩 나듯 나가면서 마지못해 앉아 있지만, 이 두 장면에서만은 여전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종교의 알짬이 이 둘 속에 스며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심(宗敎心)이란 내면적으로는 '내 탓'이라는 자기 반성이 핵심이다. 자기 성찰 없는 믿음은 위선이며 기만일 뿐이다. 바리사이인들이 예수한테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그들의 믿음에 자기 성찰이 빠지고 오만과 독단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선을 안으로 수렴하고 겸손해지도록 가르치는 것이..

참살이의꿈 2021.06.15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

시읽는기쁨 2020.11.27

산길에서 /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 산길에서 / 이성부 산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이성..

시읽는기쁨 2014.08.25

우리나라 100대 명산

난 목표를 정하는 게 싫다. 그런 걸로 남이나 나를 다그치는 건 영 질색이다. 성인이 된 뒤로는 무엇이 되려고 끈질기게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사이 들어 등산 목표를 하나 세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있다. 우리나라의 100대 명산 목록을 보고 나서부터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에 100산 정도는 올라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음이 100대 명산 목록이다. 좁은 국토인데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여럿 있다. 내가 정상을 찍었던 산은 붉은색으로 표시해 보았다. 수도권 15 감악산, 관악산, 도봉산, 마니산, 명성산, 명지산, 백운산, 북한산, 소요산, 용문산, 운악산, 유명산, 천마산, 축령산, 화악산 강원권 22 가리산, 가리왕산, 계방산..

길위의단상 2013.06.24

뒷산이 하하하

글 참 재미있게 쓴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뒷산에 대한 얘기만으로 책 한 권을 만들었다. 라는 책이다. 쓴 이는 건축가 이일훈 씨다. 얼마 전에는 라는 생태환경에 관한 책도 냈다. 서울 서쪽 변두리에 있는 지양산이 이야기의 무대다. 저자는 동네 뒷산을 오르내리며 만나게 된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를 적었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이 저자를 통해 깨소금 같은 얘깃거리로 바뀌었다. 약수터의 안내문이나 현수막, 약수터에 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물통, 지팡이에서 텃밭, 나무와 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야기의 소재다. 물론 약수터를 중심으로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일 많다. 우리의 보통 이웃인 그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욕망,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뒷산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읽고본느낌 2011.08.21

도반 / 이성선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는 지금 - 도반 / 이성선 나도 배낭을 지고 먼 길을 떠난다. 그곳은 꿈속에서만 있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어느 날 그렇게 하늘의 선물처럼 나에게 내려왔다...

시읽는기쁨 2009.01.06

깨우치다 / 이성부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 당당한 듯 서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 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가야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

시읽는기쁨 2007.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