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 14

사람을 만나고 오면 쓸쓸해진다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이번 주도 두 차례 송년 모임이 있다. 뜸한 해도 있었는데 올해는 별스럽게 만남이 많다. 사람과의 교류가 적은 편인 내가 이럴진대 다른 분들은 어떨까 싶다. 모임을 다녀오면 피곤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정의 피로도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나한테는 어렵고 힘이 든다. 대화에서는 억지로 박자를 맞춰주며 고개를 끄덕여줘야 한다. 그렇다고 속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지만 모든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타인과 만나고 접촉해야 활력이 솟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사소한 갈등이야 문제 삼지 않는다. 사람이 북적이는 데가 좋고, 모여서 수다를 떨어야 생기가 돋는다고 하니 신기하다. 나는 혼자 있어야 편하다. 사람과..

참살이의꿈 2023.12.19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 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어떤 적막 / 정현종 쓸쓸함이 그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시든 꽃팔찌를 바라보는 내 탓도 아니다. 쓸쓸함은 존재의 근원에서 퍼져 나가는 둥근 파문이 아닐까. 너와 나의 파문이 만나면 우리 마음은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만든다. 그 보이는 형상이나 이미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아예 한 몸이 되시는구나. 우주가 수..

시읽는기쁨 2023.11.29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시읽는기쁨 2023.11.06

기차표 운동화 / 안현미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 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 기차표 운동화 / 안현미 조용히 추석이 지나갔다. 추석 귀성을 안 하게 된 지도 네 해째가 되었다. 가벼워지긴 했지만 뭔가 허전하다. 그 빈 구석을 중국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게임 경기를 보며 채웠..

시읽는기쁨 2023.10.02

섬집 아기 / 한인현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 섬집 아기 / 한인현 이 동시가 194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는 해방 직후의 혼란하고 궁핍한 시대였다. 시의 배경도 외딴섬의 외딴집에 사는 가난한 엄마와 아기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갔거나 아니면 없는지도 모른다. 이 동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동요로 만들어졌다. 아기를 혼자 집에 남겨 두고 굴 따러 나온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갈매기 울음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로 들렸을지 모른다. 맘이 설렌 엄마는 굴 따는 걸 그만두고 갯벌을 가로질러..

시읽는기쁨 2023.07.18

고단(孤單) / 윤병무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손을 놓겠지만 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 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 고단(孤單) / 윤병무 존재의 쓸쓸함을 자주 느낀다. 한밤중에 잠이 깨서 사위는 적막한데 사근거리는 내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라든가,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돌아오는 어두운 길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라든가 문득문득 사는 일이 ..

시읽는기쁨 2023.06.30

쓸쓸하고 가련한

늦가을 비가 떠나가는 가을을 재촉한다. 지난밤의 차가운 비바람에 나무는 더욱 홀쭉해졌다. 성하(盛夏)의 계절을 장식하던 나뭇잎은 생명의 물기가 빠지고 바닥에 떨어져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린다. 제 역할을 다하고 나면 해체되고 소멸하는 것이 생명체의 숙명이다. 인간 역시 유전하는 만물의 흐름 속에서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가을 끝자락 풍경을 보면 울적해진다. '울적(鬱寂)'은 사랑스러운 말이다. 사전에는 '쓸쓸하고 답답한 마음'이라고 나와 있지만, 나는 '우울한 적요(寂寥)'라고 해석한다. 즉, '우울과 함께 하는 고요/평화'다. 세상사의 덧없음을 비관하면서 동시에 긍정한다. '울적'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감정으로서의 우울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이 있다. 가을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자주 생각..

참살이의꿈 2022.11.29

도봉 / 박두진

산(山)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도봉(道峯) / 박두진 A로부터 박두진 시인을 뵌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A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 그렇다면 60년대 후반이었겠지 - 학교 '문학의 밤' 행사 때 시인이 오셔서 문학반 친구들이 낭송한 자작시를 강평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의 첫 ..

시읽는기쁨 2022.11.12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어제 친구와 통화하면서 옛 동료의 투병 소식이 화제에 올랐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분인데 지금은 인지 능력이 떨어져 친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신다는 전언이다. 세월 앞에서 누구나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했다. 통계에 의하면 80세까지 생존 확률이 30%라는 것이다. 지금 얼굴을 맞대는 친구들의 70%가 저 세상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때가 10년도 안 남았다. 물론 내가 포함될 확률도 70%다. 100세 시대라고 떠들면서 오래오래 살 것 같..

시읽는기쁨 2022.10.25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부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 나와 한 몸이니까, 내가 쓸쓸할 때 같이 쓸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은, 친구들은, 타인이니까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엄마는 우산을 내어주겠지만, 부처님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그런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할 거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네코 미스즈의 또 다른 쓸쓸한 시다. 짙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달리아 핀 날..

시읽는기쁨 2022.10.17

추석 만월 /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느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흘리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 추석 만월 / 송진권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다. 심..

시읽는기쁨 2022.09.12

외출 / 허향숙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근처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 외출 / 허향숙 요사이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다. 소설과 이 시의 분위기가 닮은 데가 많다. 인생에서 상심(傷心)은 늘 함께 하는 것이 ..

시읽는기쁨 2022.04.10

추석 산행

집에 일이 생겨 추석인데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지난주에 미리 성묘하고 어머니에게도 다녀왔다. 추석 차례를 거른 건 20년 전에 독일 연수를 가 있을 때를 빼고는 처음이다. 한가윗날 아침 식탁에는 아이들이 출가하기 전처럼 넷이 오붓하게 앉았다. 그러나 밝게 웃을 수만은 없는 분위기였다. 아침을 먹고는 혼자 배낭을 꾸려 남한산성으로 갔다. 차는 은고개에 주차하고 남한산성 한봉을 돌아오는 라운드 산행이었는데, 쓸쓸하고 외로운 심정으로 걷는 산길이었다. 산객 서너 명 정도만 만났다. 한 분은 지나치며 "명절이라 전부 고향 찾아가고 사람이 없네요"라며 씁쓰레 웃었다. 갈림길 쉼터에서는 바람이 시원했고, 동쪽으로는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비틀린 자세로 서 있는 서어나무가 멋있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

사진속일상 2014.09.08

쓸쓸 / 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

시읽는기쁨 2013.03.18